소설 '자살'연재중입니다. “그래. 너도 심심하면 삐삐쳐.”
*연재에 앞서...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분들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갑자기 잡힌 '출장'으로 고민의 시간이 적어 글을 남기지 못햇습니다. 아직 필력이 부족하여 글로 먹기 살기는 힘들어서...^^
최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많은 응원과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광주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기울어 있었다.
김 전무와 나는 조용히 차에서 내려 시행사 사무실 건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담당 이사와 실장이 미리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형식적인 악수와 인사가 오간 뒤, 우리는 바로 미팅룸으로 이동했다.
적당히 차려진 과일 접시와 생수병 몇 개. 불필요하게 격식을 차리지 않은, 오히려 더 편안한 분위기였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오래 준비한 일이라 직접 한 번 뵙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나는 밝은 얼굴로 말했지만,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우리가 공들였던 광주 현장은 여러 번의 미팅과 수정을 거쳤지만, 여전히 시행사의 결정은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확실한 매듭을 짓고 싶었다.
김 전무는 조율의 달인이었다. 과하지 않게, 하지만 분명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나는 그의 보조를 맞추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이끌었다.
약 한 시간 반쯤 지나자, 담당 이사의 말투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사실 저희도 마음은 거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표님이 직접 내려오셨으니, 저희도 응답을 드려야죠."
그 말은 사실상 긍정적인 신호였다.
"감사합니다. 그 말씀 믿고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팅은 그렇게 마무리됐고,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인근의 한정식집에서 조용한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 자리에서는 딱딱했던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고, 나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
"아무리 업무라도, 사람과 사람의 일이잖습니까. 같이 웃고 마시는 술 한 잔이 더 많은 걸 풀어주는 것 같습니다."
이사는 웃으며 술잔을 맞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승리를 안고, 밤늦게 호텔로 돌아왔다.
로비에서 김 전무가 내게 말했다.
"대표님,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마무리되면 좋은 그림 나올 겁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오늘은 덕분에 큰 도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객실로 흩어졌다.
늦은 밤,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광주의 불빛을 바라보다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Time-1
신림동의 좁은 골목길, 여름밤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수능 100일을 앞둔 어느 날, 고3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지만, 오늘만큼은 그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나와 D, 그리고 몇몇 같은 반 친구들은 신림동의 익숙한 술집에 모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과 공초로 가득 찬 재떨이가 놓여 있었고, 주변의 소음을 뚫고 시덥지 않은 농담과 나름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야, 수능 100일인데 이제 진짜 공부해야 되는 거 아니냐?”
D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의 말투엔 진지함보다는 농담이 더 묻어 있었다.
“니가?”
내가 술을 입에 털어 넣고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친구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엔 다들 숨기고 싶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수능, 대학, 미래. 그 단어들은 술잔을 돌릴수록 점점 무거워졌다.
“너희, 진짜 대학 가면 뭐할 거냐?”
같은 반 K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평소 농담이나 던지던 녀석이 이런 질문을 하니 다들 잠시 멈칫했다.
“뭐, 대학 가면 여친이나 사귀어야지. 지금이야 공부한다고 바빠서…”
D가 능글맞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나도 모르게 ‘여친’이라는 단어에 R이 떠올랐다. Y와 R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지 한 달쯤 됐다. 왜 헤어졌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까. 테이블 위 소주병이 점점 쌓여갔고, 우리의 대화도 술기운에 젖어 점차 느슨해졌다. 그 와중에 문득 Y가 생각났다. 요즘 Y는 자주 빠졌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말수가 적어졌고, 눈빛이 어딘가 무거워 보였다. 오늘은 같이 술 한잔하자고 꼬셔놨는데,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때, 허리춤에서 삐삐가 울렸다. ‘0703’. 익숙한 번호였다. R.
순간 애매한 긴장감이 나를 휘감았다.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밖으로 나갔다. 공중전화 부스 앞엔 몇몇 사람이 줄을 서 있었지만,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즈음 내 차례가 됐다.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 몇 번 뒤, 맑고도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어…오랫만이다?”
최대한 덤덤하게 물었지만,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뭐하고 있나 싶어서. 뭐해?”
R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조용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했지만, 쉽게 꺼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나? 애들이랑 술 마시지. 수능 100일째.”
R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쩐지 반갑고도 아렸다.
“...Y도 있어?”
R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아니, Y는 아직 안 왔어. 오늘 좀 늦나 봐.”
사실 Y가 올 가능성이 낮다고 직감했지만, Y와 제일 친한 친구인 나는 R에게 굳이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
R의 목소리에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잠깐 침묵이 흐르고, R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해봤어.”
나는 말없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심심하면 삐삐쳐.”
“그래. 너도 심심하면 삐삐쳐.”
R은 일부러 힘을 준 듯,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에 보자.”
나도 짧게 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공중전화 부스를 나오자, 무더운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감정에 뭍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R의 목소리가, 그리고 그 미묘한 침묵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Y와 R의 이별, 그리고 Y의 최근 모습. 뭔가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한 감정들이 나를 어지럽혔다.
그때, 골목 저편에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2차 가야지!”
나는 손을 들어 알았다는 뜻을 전하고,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던지며 친구들에게 걸어갔다. 그 뒤앤 화려한 네온사인 틈으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