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살'연재중입니다._“멈추면 굶어 죽는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서울의 빌딩 숲이 반짝였다. 오후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들어와 책상 위 서류를 은은하게 비췄다. 나는 분양대행사 대표로서 늘 시장의 맥박을 읽으려 애썼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긴장이 감돌았다. 곧 조 대표님, 내게 이 바닥의 생존 법칙을 가르쳐 준 10년 연배의 선배이자 자산운영사 대표가 방문할 예정이었다. 예전엔 같은 회사에서 치열하게 뛰었지만, 이제 각자 회사를 꾸리며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도 그와의 만남은 늘 설렜다. 옛 추억과 새로운 기회가 얽히는 시간이었으니까.
문이 열리며 조 대표님이 들어왔다. 세월이 깎아낸 주름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재훈아, 사무실이 점점 번듯해지네.”
그가 농담처럼 툭 던지며 소파에 앉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커피로 할까요, 아니면 차 한 잔?”
내가 물으며 찻잔을 준비했다.
“커피로 해. 요즘 늙었다고 차만 마신다 놀리는 놈들 많아서.”
그가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커피 향이 사무실을 채우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레 옛날 얘기로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같이 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형님이 저 끌고 다니면서 협력사 미팅 잡아줄 때, 저 진짜 어리바리했죠. 기억나세요? 그때 K사 정 이사, 저보고 ‘애송이’라고 놀렸던 거.”
조 대표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웃었다.
“하하, 그 양반 성격 아직도 안 변했더라. 근데 너도 그때 귀엽게 어리바리했지. 그래도 눈치 하나는 알아줬잖아. 지금 이렇게 대표 자리까지 올라온 거 보면.”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덧붙였다.
“그때 우리 회사, 참 웃긴 일 많았지. 박 차장 기억나?”
“박 차장? 아, 그 S사 둘째 아들!” S사는 이미 코스피 상장 회사였다.
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그 사람, 신분 숨기고 입사해서 우리랑 같이 자료 뽑고 야근하던 거, 진짜 영화 같았어요.”
조 대표님이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다.
“그러니까! 우리 다들 그 친구 평범한 신입인 줄 알고 막 부려 먹었잖아. 근데 어느 날 상장사 둘째 아들이란 것을 알았을 때. 심지어 회사 이름이 박 차장 이름이었잖아?”
“그게 참 박 차장 매력이었지.”
조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 많아도 허세 안 부리고, 묵묵히 자기 길 가는 스타일. 지금은 뭐 하나? 가업 잇는다고 들었는데.”
“네, 지금은 아버지 회사 임원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가끔 연락 오는데, 옛날 생각난다고 우리 회사 얘기 자주 해요.”
나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박 차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그 시절의 풋풋함을 되살려줬다.
추억에 젖어 있던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자, 조 대표님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재훈아. 오늘 내가 온 건 그냥 옛날 얘기나 하자고 온 건 아니야.”
그의 눈빛이 한층 진지해졌다.
“새로운 시행사업 하나 하려고 하는데. 용인 쪽, 스마트 시티 프로젝트 관련된 거야.”
“용인? 그쪽 지금 뜨겁죠. 땅값도 치솟고, 그런데 부동산 시장이 워낙 어려워서.”
“그렇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금융도 읽어줄지…”
내가 말끝을 흐리자, 조 대표님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금융은 이미 정리해뒀다. 내가 이미 몇몇 투자사랑 물밑 작업 끝냈어. M 증권이랑 긍정적으로 검토해 본다고 했다. 너도 시행 지분 참여하고 우리 자산운용사가 자금 조달하고, 분양대행사가 마케팅 맡으면 시너지 제대로 낼 거야.”
그는 책상 위에 간단한 사업계획서를 꺼내놓았다.
“여기 대략적인 그림 나와 있어. 한번 훑어봐.”
나는 계획서를 받아들며 빠르게 훑었다.
“근데 형님, 리스크도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용인 땅값이 워낙 높아서 초기 자본 부담이 크고, 분양률이 안 따라주면 우리 둘 다 휘청일 수도 있어요.”
“그걸 누가 모르나?”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부동산 경기 침체로 땅값이 그나마 좀 싸게 나온 거야. 타이밍 잘 맞추면, 이 프로젝트로 우리 둘 다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 대표님의 제안은 매력적이었지만, 전부를 걸어야 하는 만큼 위험도 컸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기회를 잡지 않으면 뒤처지는 법.
“형님, 솔직히 시행은 처음이라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진지하게 검토해볼게요.”
창밖으론 서울의 불빛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조 대표님과의 대화는 옛 추억을 되살리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용인 프로젝트는 단순한 사업이 아니었다. 우리 회사의 다음 챕터, 그리고 모든 부동산 종사자들이 꿈꾸는 ‘시행’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될 터였다. 하지만 주변에 시행사업을 하다가 한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진 것을 수 없이 보았던 터라, 지금까지 이루워 온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게 솔직히 두려웠다. 그때 M의 향기가 코끝을 스쳐지나갔다. 한동안 잠잠했던 향기에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텅빈 사무실에는 혼자 남아 있었고, 난 몸을 일으켜 퇴근을 준비하러 컴퓨터 전원을 껏다. ‘시행’이라
Time_2
몇 달이 흘렀다. 전단지를 돌리고, 현수막을 걸고, 사람들의 차가운 반응을 견디며 보낸 시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계약이 늘어나고 소득도 늘어났다. 영업을 뛰고, 상담을 하고 계약까지 마무리 짓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무엇 하나 소홀히 하면 그 연결고리는 도미노처럼 무너져내렸다. 팀원을 모집하여 팀장이 되었다. 영업은 팀원들에게 맡기고 나는 신뢰 있게 상담을 하고 계약까지 이끌어 내는 역할 분담을 했다. 내 밑에는 세 명의 팀원이 생겼다. 우리 팀은 다른 팀에 비해 젊은 팀원으로 구성이 되었고, 한때는 8명의 팀원이 있었지만, 나의 영업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들이 이탈했고, 지금 남아 있는 세 명의 팀원들은 나를 믿고 성실하게 따라 주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로 이 일에 매달렸지만, 목표는 하나였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 누구에게는 명품에 벤츠가 목표일 수도 있고, 누구는 나처럼 끝으로 내몰았을지는 모르지만 하나같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
우리의 일은 단순했다. 홍보를 하고 상담을 유도하고, 계약으로 연결시키는 것. 하지만 단순한 일이 쉬운 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거리를 누비며 전단지를 돌리고, 부동산을 찾아다니며 명함을 내밀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 내뱉었다. 무시를 당하고, 욕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우리의 절박함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런 절박함은 실적으로 나타났다. 한 달 만에 우리 팀은 가장 높은 계약 건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우리 팀의 실적이 오르자, 다른 팀에서 우리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았다. 재성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팀장님, 소문 들으셨어요?” 나는 팀원들의 도장을 전단지에 찍어 주며 재성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소문? 무슨 소문?”
“팀장님이… 부동산 실장들하고 자고 다닌다는 소문이요. 그래서 부동산에서 우리 팀에만 밀어준다는.”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외에도 많은 소문이 도는 것을 알고 있었다.
‘쟤네들은 사기로 브리핑을 하네... 어쩌네저쩌네.’
“신경 쓰지 마. 그럼 지네들은 부동산 대표랑 자라고 해. 실장보다는 대표가 높은데, 대표랑 자면 그 팀에 밀어줄 거 아니야? 지네들 계약 못 따서 그러는 거야. 우리처럼 노력은 안 하면서 남들 잘되면 배 아파 하는 그런… 남 욕할 시간에 전단지 하나 더 뿌리겠다.” 재성이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닥치고 빨리 와서 전단지나 찍어.” 재성이는 못 이긴 척 자리에 앉아 도장을 집어 들었다.
나는 잠깐 손을 멈추고 재성이에게 말했다.
“전화해서 다 들어오라고 해.” 재성이 말고 다른 두 명은 전단지 배포를 위해 외부 영업 중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예약 손님도 없으니, 일찍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회식이나 하자.”
뜨거워진 불판 위에 고기를 얹자 ‘치~익’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어냈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업하느라 시간이 모자라서 오랜만에 모인 자리였다. “오랜만에 보네. 주변에서 어떤 얘기가 들리는지 알고 있는데 신경 쓰지 마. 우린 그냥 우리 할 일 하면 돼. 소문 따위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어차피 이 현장 끝나면 안 볼 사람들이야. 통장의 숫자가 인격이고 능력이야.” 나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맞긴 한데 웃기잖아요.” 재성이가 다시 한번 토를 달았다.
나는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우린 월급쟁이가 아니야. 수수료로 먹고사는 거야. 결국 돈 벌어야 살아남는 구조잖아. 남들이 뭐라 하든, 우리만 잘하면 돼. 고객이 우리를 믿고 선택하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그럼 소문은 그냥 무시하자는 거예요?”
“무시하는 게 아니라, 신경 쓰지 말자는 거야. 그냥 오늘 술 한잔 거하게 하고 내일부터 다시 전단지 뿌리러 나가면 돼.”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날 밤, 우리는 소주를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이런저런 얘기로 밤은 깊어져 갔고,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테이블을 채우고 마지막을 향해 달려갈 때 내가 마지막으로 건배 제의를 했다.
“자, 이제 난 갈 거니까 더 먹을 사람은 먹고... 다 잔 들어. 우리 구호 알지?”
중심은 흔들렸지만 모두 일어서 잔을 높이 들었다. 내가 힘 있게 선창을 했다.
“멈추면!!!”
“굶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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