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 Pedro로 가는 기차
임사 체험(臨死體驗, 영어: near-death experience, NDE)은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를 느끼는 체험이다. 임사 체험은 죽음 전에 일어난다고 주장되는 기이한 현상이다. 간혹 임사 체험과 유사하지만 다른 개념인 유체이탈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위키피디아)
시작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앞은 한 치도 보이지 않고 숨이 자꾸 차 올라왔다. 그래서 난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바닷속에 빠져 있는 줄 만 알았다, 하지만 이내 호흡이 편안해지고 머리 위 어둠을 뚫고 조각난 빛줄기들이 듬성듬성 내리쬐기 시작했다.
마치 터널 같은 그곳을 힘겹게 기어 나오는 순간,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압도적인 스케일과 형언할 수 없는 색깔로 가득 찬 초현실적인 풍경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하늘은 마치 허블 망원경이 수백 광년 떨어진, 이름조차 생소한 성운을 찍어 보내온 것과 흡사했다.
특정색으로 형언하기에는 모든 색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변화했고 순간순간 형광색으로 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생소한 하늘 아래에는 정말 비현실적으로 큰 갯바위들의 모습이 나를 압도했다. 그 갯바위들 사이로 쉴 새 없이 집채만 한 파도가 부딪치고 거대한 흰색 포말이 생겨 내가 걷고 있는 모래사장을 덮쳤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얼굴에 닿는 시원한 물보라와 발가락 사이로 움직이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면 느긋하게 모래톱을 걷고 있었다.
눈앞의 물보라 방물들이 모여 순식간에 사람의 형체가 되더니 휙~휙~ 나를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어쩌다 비를 맞고 만 투명인간 같은 그 형체들을 잘 파악하기가 어려웠는데 눈에 익숙해지자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천호동 우리 집 셋집에 살던 백승호.... 손가락 다섯 개가 다 붙은 합지증 환자 1학년 짝꿍 손문철
아주 어릴 적 만났던 인물들이다. 평소 같으면 기억도 못해냈을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지 그들의 얼굴은 물론 이름까지도 생생히 떠올랐다. 계속 밀려오는 파도에 물보라 인간들도 계속 생겨나고 난 찰나이지만 덕분에 한참 동안이나 내 기억 저편에 숨어있던 인물들과 재회한다.
마치 홍수에 침수된 자동차가 둥둥 떠밀려 오듯 갯바위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뚫고 무언가 모래사장으로 떠밀려 내려와 떡 하니 내 길을 막는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긴 기차다. 도대체 몇 량이 묶어있는지 끝이 안 보여 셀 수가 없었다.
구부러진 채 밀려온 기차 겉면의 커다란 흰색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San Pedro'
그래, 내가 고등학교 등굣길에 매일 마주 하던 '산 페드로' 항으로 가는 화물기차였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끝도 없이 지나가던 이 기차 덕분에 난 심심치 않게 지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더 이상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나는 스스럼없이 기차에 오른다.
기차가 선 곳에는 고풍스러운 철제 양문이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양문 끝에는 고개를 90도는 꺾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커다란 석고상이 서 있다. 다윗과 마돈나의 나체 상이었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잘 안다.
건널목에서 나와 함께 San Pedro로 가는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려주던 내 고등학교 친구 동현이가 묻혀 있는 곳이다.
마치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지키는 파수꾼 같은 모습의 다윗과 마돈나 상을 뒤로하고 난 동현이의 묘지를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푸른 잔디 위에 작은 비석을 등진 채 앉아 있는 동현이가 보인다. 세상을 떠날 때 앳된 그 모습 그대로다.
난 그제야 내가 만나고 있는 이들이 모두 망자들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는다.
묘지 저편 어디선가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들린다.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하얀 스타킹에 멜빵 반바지를 입은 어린 나의 손을 꼭 잡고 계신다.
Good morning son
I am a bird Wearing a brown polyester shirt
좋은 아침이야 아들아.
나는 새 란다. 갈색 폴리에스테르 셔츠를 입은
You want a coke
Maybe some fries, The roast beef combo's only $9.95
콜라 마실래? 아니면 프라이라도 좀 먹을래?
로스트비프 콤보도 고작 9.95달러 밖에 하지 않는단다.
어디선가 계속 벤 폴즈의 ‘Still Fighting It’이라는 노래가 들려오고 나는 텅 빈 장례식장 안에 홀로 서있다. 호화스럽게 보이는 마호가니 관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부터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불쑥 손이 하나 앞으로 들어오더니 육중한 관 뚜껑을 순식간에 열어젖힌다.
열린 관 안에서 비릿한 냄새와 함께 한 무리의 비둘기 떼가 나와 천장으로 치솟아 오른다.
모두 흉측한 모습의 왼눈박이 들이다.
텅 빈 관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는 불쑥 들어온 손의 주인을 찾아 시선을 돌린다.
유난히 털이 많은 발등 부터 낡고 지저분한 붉은색 망토....
그리고 나의 시선이 멈친 헝클러진 그의 머리
그래, 난 이 사람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티베이 감옥에서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