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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캇 리 Aug 02. 2024

동파육과 인간의 존엄성

알리의 추억 

몸에 연결되었던 이름 모를 튜브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으로 배꼽 왼쪽 편에 꼽혀 있던 G-튜브 (위루관 /Gastrostomy tube) 마저 제거하자 슬슬 식욕이 돌기 시작했다. 

(위루관은 구강으로 음식 섭취가 불가능한 환자에게 영양공급을 위해 위장관에 직접 관을 넣어 음식물을 주입할 수 있도록 만든 관이다)


처음에는 갈증이었다. 옆 침대 환자의 여자친구가 방문할 때다 손에 들고 오는 얼음 가득한  large size coke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거렸다.

탄산음료를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라면, 짬뽕, 육개장 같은 국물 있는 얼큰한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졌다. 

하루 세끼 제공되는 미국병원의 저염식 식사는 보기에도 맛이 없어 보였고 실제로도 정말 맛이 없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아내는 방문할 때마다 바깥 음식을 조금씩 가져다주었지만 이미 두 개의 신장이 모두 망가진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란 유태인의 코셔푸드만큼이나 깐깐하고 제한적이었다.

과일은 오렌지, 수박, 바나나, 망고 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고 평소에도 잘 안 먹던 딸기 같은 베리 종류만 가능했다. 남들은 건강을 위해 억지로 챙겨 먹는 채소도 나에겐 몇 종류 밖에 허락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익혀 먹으라는 단서가 달렸다. 그리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국물 있는 음식은 절대 피해야 되는 리스트 최상위에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며칠간 아내를 집요하게 졸라 "그게 그렇게 맛있어?"라며 어리둥절하는 아내 앞에서 육개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다.


남들이 보면 얼마 전까지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식탐을 부리는 이런 모습이 조금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생존 욕구들 중 으뜸이 바로  '식욕'이라는 사실을 감옥에서 뼈저리게 체험한 나에게는 이런 내 모습이 사실 그리 낯설지 않다.


김홍신 작가의 시 중에 '겪어 보면 안다'는 제목의 시가 있다. 

그 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굶어 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것을 ' 


 '먹을 것이 없어 굶는다'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내가 이젠 이 시 구절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직까지 수치심이 스멀스멀 올라와 혼자 얼굴이 벌게지기까지 하지만 왠지 그 기억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생존 욕구에 힘없이 짓밟혔던 나의 존엄성에 대한 후회와 반성 때문인 것 같다.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가 걷잡을 수 없이 급속히 펴지자 감옥은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서둘러 변호사, 가족 할 것 없이 모든 면회를 완전히 금지시켰고 죄수들에게는 마스크를 지급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체온을 체크했다.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이 갇혀 있는 감옥 특성상 코로나가 한번 발병하면 '답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감옥 측은 극도로 예민해져 출입 교도관 수 마저 줄이고 한번 시설로 들어오면 퇴근 없이 7일씩 교대 근무라는 강수를 두었다. 하지만 코로나의 기세는 쉽게 수 그러 들지 않고 심심치 않게 다른 감옥의 발병 소식이 전해지자 마침내 감옥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품의 반입까지 막아버렸다.


덕분에 죄수들은 영치금이 있어도 물건을 마음대로 살 수가 없어졌다. 휴지, 비누, 치약 같은 공산품에는 수량 제한이 걸렸고 음식류는 전면 판매가 중단되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감옥 내 저장되어 있는 물품으로 견디어 보자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감옥의 보릿고개가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자 죄수들은 날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휴지 한 장 때문에 고성이 오가고 없어진 치약 때문에 주먹질까지 해댔다. 하지만 그 절정은 감옥에서 배급되는 식사량이 급격히 줄고부터였다. 

하루 세끼가 두 끼로 줄었다.

주먹밥이나 빵 대신 찐 감자가 배급되었고 돼지고기가 주식인 한족을 위해 그나마 살코기 몇 점이라도 찾아볼 수 있던 유일한 반찬은 눈곱만 한 돼지비계 조각만 둥둥 떠 다니는 멀건 국으로 대체되었다. 


늘 배가 고픈 상태였다. 거기다 날씨는 폭염이 계속되었다. 선풍기 하나 없는 공간은 40도가 넘게 느껴졌고 배고픈 죄수들은 옆사람의 땀 냄새와 숨소리에 조차 짜증이 폭발할 정도였다. 

사건이 터진 밤도 쉽게 잘 못 이루는 열대야였다. 중국 감옥에서는 군대처럼 죄수들의 탈출, 자해 등을 예방하기 위해 죄수끼리 돌아가며 순번을 정해 매일 밤 보초를 서야 한다. 중국어로 '즈발(直班)'이라고 하는데 이 즈발을 서던 한 녀석이 방장의 음식을 몰래 훔쳐 먹다가 걸리고 만 것이다. 

침대 아래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방장은 자신이 만만치 않은 뒷돈을 줘 가면 교도관을 통해 어렵게 반입한 동파육 (돼지고기를 졸여 만든 중국 요리의 한 종류)을 훔쳐 먹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그만 눈이 돌고 말았다. 


 

"싸비!  차오 니 마! 모우짜이! "


온갖 욕설과 함께 방장의 발길질이 시작되었는데 녀석은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면서도 동파육 반찬통을 손에서 놓지 않고 꾸억꾸억 자신의 입속으로 고기를 쑤셔 넣고 있었다.

그만큼 맛이 있었는지 아니면 너무 배가 고파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모습에 열이 오를 데로 오른 방장은 반찬통을 뺏어 있는 힘껏 내동댕이 치고, 아까운 동파육 조각들은 바닥의 회색 먼지에 뒤범벅이 되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분이 풀릴 때까지 녀석을 두들겨 패던 방장이 교도관 의해 끌려 나간 후, 나는 그날 밤새 돼지 꿈을 꾸며 잠들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꿈속의 돼지를 실제로 먹게 된 것은 탈북자 출신 감방 동기 경철이 덕분이었다. 더위에 힘든 작업까지 지칠 대로 지친 채 음식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선다. 또 멀건 돼지비계국에 감자 인지 고구마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구황작물이다.

보고만 있어도 이젠 입이 텁텁해지는 느낌이지만 밀려오는 허기와 오후 작업을 위해서는 배속에 무엇이던 당장 집어넣어야 할 판이다.


"삼촌 이거 맛 좀 보세요"  


그때 신이 나 보이는 경철이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돌돌 말아 싸가지고 왔다.  

펼쳐보니 어제 그 동파육이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원래 갈색 빛깔이었던 것이 수육처럼 희멀건 색으로 변하고 손으로 잡아 뜯은 듯 보이는 단면으로 미루어 습득 경로가 한눈에 펼쳐졌다. 침대 밑부터 바닥 여기저기 흩어진, 먼지로 뒤범벅된 고기점들을 빗자루로 모아 물로 헹구고 씹다 뱉어 이빨자국이 난 부분들은 손으로 뜯어 대충 손질한 모양이다.

방장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끌러 나가던 그 난리통에 무염치와 빠른 눈치로 단련된 경철이가 잽싸게 문제의 동파육을 남들 몰래 수거한 것이다. 

8년 넘게 영치금 없이 감옥에서 버텨온 그만의 생존본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삼촌 왜 안 드세요? 다른 놈들 봐요, 빨리 드세요.'


고기점 사이사이 아직도 끼어 있는 알 수 없는 이물질들과 선명한 사람 이빨자국에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경철이의 그 짧은 권유 한마디에 체면 따위는 한순간에 내팽개치고 개눈 감추듯이 허겁지적 그 동파육을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단백질의 맛 인가!

나는 돼지고기가 그렇게 맛있는 고기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때 그 미각의 황홀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감옥 내로 다시 물품이 반입되기 시작했고 정상인으로 돌아온 나에겐 그 기억은 정말 씻을 수 없는, 밑바닥 중 밑바닥 같은 최악의 수치심으로 남게 되었다. 특히 감옥에서 알리를 볼 때마다 나는 그 부끄러운 기억 때문에 매번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점심시간, 혼자 구석에 서서 매일 반찬 하나 없이 손에 쥔, 밥 한 덩어리에 어렵게 구한 할랄푸드 간장을 뿌려 먹던 알리의 모습과 마주칠 때면 더욱 그랬다. 

아들뻘 나이인 알리는 7년이라는 세월을 그렇게 잘 버티었건만, 고작 몇 개월을  못 견딘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작업시간 중에도 때가 되면 낡디 낡은 수건을 펼치고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며 예배를 드리는 그의 독실함은 비록 믿음을 다르지만 같은 종교인으로서 저절로 경의를 표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낮에 먹은 육개장 때문인 것 같다.

그놈의 미련한 식탐 때문에 저녁 내내 헛구역질이 계속되었고 덕분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한참 동안 부여잡고 웩웩거리던 휴지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 위치를 조정해 가까스로 몸을 반쯤 일으켜 본다,

때마침 천장에 달린 TV에서 중국 신장 위구르 관련 소식이 흘려 나온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강제노동을 이유로 중국 신장위구르 산 면화의 수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인 것 같다.


언젠가 가 보았던 신장 위그루 자치구의 세계 자연 유산 '천산 천지'의 풍경이 떠오른다. 사시사철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의 모습. 그리고 그곳을 터전으로 수천 년을 살아온 위그루족.


갑자기 티베이 감옥에서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던 알리가 궁금해진다. 


지금쯤은 그도 집으로 돌아갔을까? 



알리에 대한 추억 


알리는 감옥에서 내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영어로 말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는 무슬림이었고 중국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어색한 서구적인 외모의 신장 자치구 출신 위그루족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영어로 된 교재 몇 권을 들고 있었고 그 책에 실린 문제를 물어왔다. 

난 시간이 허락하는 데로 꼼꼼히 가르쳐 주었고 그 후로, 알리는 자기 전에 꼭 짬을 내어 책을 들고 우리 방을 찾았다. 그는 내가 중국 감옥에서 본 사람 중 가장 똘똘한 엘리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알리는 위그루족을 한족화 하기 위한 중국 공산당 정책에 의해 선발되어 고등학교 때부터 베이징에 와 공부를 하던 한마디로 말하면 국비 유학생 출신이었다. 하지만 알리는 대학생활 중 체포되었고, 이곳 티베이에서만 7년째 복역 중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평생 양만 치며 근근이 살아온 가난한 부모와 누이에게는 집안에 희망이고 또 동네의 자랑거리였던 알리가 저지른 죄는 불온한 영상을 봤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중국 공산당에 대항해 독립을 요구하며 테러를 저지르는 위그루인들의 영상을 찾아봤고, 또 그 영상에 공산당의 심기를 건드리는 댓글까지 달았다는 이유로 무려 징역 8년을 받은 것이다. 


알리는 석방이 얼마 안 남았지만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신장 위그루 자치구의 수용소로 끌러가 사상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중국 공산당이 위그루 민족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만든 이 재교육 캠프는 수많은 여성 수감자들이 한족 경관들에 의해 조직적인 강간, 집단 성추행, 고문, 강제 피임이 자행되는 곳으로 이미 악명 높은 곳이다.        

알리 같은 남자 수감자들은 강제노역과 함께 공산당과 시진핑을 찬양하고, 혁명가를 부르는 ‘세뇌’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버리고 중국 공산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무자비한 고문이 뒤따르고 또 언제 석방될지도 알 수 없다.


알리의 나이 드신 부모님은 일 년에 한 번, 장춘 티베이 감옥에 오셨다. 

신장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직행은 없지만 비행기를 타면 그래도 비교적 쉽게 올 수 있겠지만, 가난한 노부부는 아들을 보기 위해 버스에서 며칠 동안 쪽 잠을 자고, 몇 번의 기차를 갈아타고, 그렇게 꼬박 일주일이 걸려 이곳을 찾아온다.  

면회실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볼 때마다 더 야위어 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외아들의 모습에 노부모는 눈물을 흘리고....

없는 살림에 일 년 치 영치금을 마련해 매년 이 먼 길은 찾아와 주는 늙은 부모의 고맙고 안타까운 모습에 자식은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7년을 견디어 왔건만… 알리는 또 얼마나 긴 시간을 신장의 수용소에서 보내야 될지 알 수 없다.


신장 위구르 강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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