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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캇 리 Aug 07. 2024

내가 재활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

그녀를 찾습니다

아무 맛도 없는 아침을 꾸역꾸역 다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내가 요즘 이렇게 억지로라도 아침식사를 깔끔하게 비우는 이유는 오전에 있을 재활 프로그램을 위해서이다. 

이제 제법 사람꼴로 돌아온 나는 일주일에 세 번, 휠체어를 타고 재활실로 가 근력 회복을 위한 운동을 집중적으로 한다 


난 이전에는 사람의 육체가 이렇게 연약한 건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처음에는 고작 두 달 가까이 누워 있었다고 50년 넘게 멀쩡히 잘 사용해 온 몸이 한순간에 이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았다.


원래도 마른 체형인 나는 평소 180cm 키에 70 킬로 정도를 늘 유지했는데 그 짧은 기간에 몸무게가 무려 15킬로그램이나 줄었다. 

그래도 이젠 상체, 특히 팔은 그런대로 볼만하고 감각도 제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뼈다귀에 가죽만 씌운 듯 바짝 말라버린 하체였다.

피부에는 거무튀튀한 이상한 딱지들이 들러붙어 있는 듯 보였고, 만질 때마다 허물이 벗겨지듯 허언 가루가 날렸다.

보기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좀처럼 근력이 회복되질 않아 스스로 움직여지지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배터리가 나간 TV 리모컨처럼 아무리 머리로 지시를 내려보고 몸을 비틀며 안간힘도 써봐도 내 다리는 요지부동이었다. 덕분에 두 다리는 내 몸의 성가신 짐짝으로 변해 두 팔만 괜히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침대에서도, 휠체어에서도 축 늘어진 다리를 팔로 하나씩 들어 옮겨야 하는 수고로움이 계속됐다.


사실 내가 요즘 이렇게 기를 쓰고 재활에 목을 매는 이유도 바로 이 두 다리에 있다.

물론 혼자 고생하는 아내를 위한 것이 재활의 최종목표이겠지만 지금 눈앞, 당장의 시급한 목표는 어떻게든 다리를 움직여 혼자서 대변을 처리하고자 함이다.

튜브를 타고 내려가는 소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차고 있는 기저귀에 늘 신세를 져야 하는 대변은 정말 고욕스러움, 그 자체였다.

때마다 병실에 진동하는 냄새와 엉덩이 피부에 느끼지는 찝찝한 그 감촉도 싫지만 다 큰 성인이 그 뒤처리를 또 누군가에 손에 맡겨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기저귀를 풀고 엉덩이에서 다리까지 흘러내린 변을 차가운 휴지로 빠르게 닦아내리는 인도계 여자 CNA(간호보조사)의 눈길을 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병원 그리고 환자라는 특수한 상황을 아무리 주입해 봐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훅' 하고 올라오는 그 부끄러움의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잠시라도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최대한 변을 참아 보다가 그만 기저귀 용량 초과의 실수를 범 할 때면, 돌아누워 있어도 평소보다 더 거칠게 움직이는 손길에서 그녀의 짜증이 한 바가지 고스란히 느껴져 몸들 바를 몰랐다.

조금이라도 덜 먹으면 어떻게든 변의 횟수나 양도 덜 할 것 같은데 그놈의 식욕을 이겨내기도 쉽지 않아 한마디로 진퇴양난이었다. 며칠 전에는 별로 특별한 걸 먹은 것도 없는데 설사가 그치지 않았고, 호출벨에 뒤늦게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저귀는 물론 환자복, 침대시트까지 내 부끄러움의 증거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샤워실로 옮겨져 나체의 모습이 되어 그녀에게 물고문, 아니 거친 물세척을 당해야만 한다.


지나친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이런 비참함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길은 빠른 재활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짐볼 위를 구르고, 보조난간을 잡고 워킹머신 위를 걷고 또 걸었다.

마침 운 좋게 내 재활 치료사도 한국계였다. 한국어도 잘하고 너무나 상냥한 조카뻘쯤 되는 '제니'라는 이름의 아가씨였는데 내 불타는 재활 의지에 감명을 받았는지 아니면 졸라대는 내가 귀찮아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게 재활프로그램이 없는 날에도 재활실 방문을 허락해 주었다.

아침식사를 해치우기가 무섭게 나는 혼자서도 이젠 제법 익숙해진 휠체어 탑승을 한다. 침대에서 엉덩이 옮겨 먼저 안착시키고 마리오네트 인형의 것처럼 힘 풀린 두 다리를 하나씩 들어 휠체어로 차례차례 옮겨 온다. 

그리고는 이젠 제법 근력이 붙은 두 팔로 힘차게 바퀴를 굴려 재활실로 내달린다.


몇 주간의 하드 트레이닝 덕분인지 다리에도 제법 근력이 붙은 느낌이다.

병실 안에서 가까운 거리를 움직일 때는 휠체어 대신 워커(WALKER)라는 네발 달린 보행기만으로도 얼추 가능해졌다.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젠 치욕과 같은 대변 문제를 혼자 감당할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마침, 그날은 필리핀계 신입 보조 간호사의 근무시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부탁을 했고, 워커와 그녀에 의지해 대충 얼굴을 닦는 척하다가 옆에 있는 변기를 가리키며 저기서 대변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직 안된다고 손사래를 치던 그녀를 집요하게 회유해 나는 마침내 변기에 앉았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듯 바로 코 앞에서 그녀가 지켜보고 있긴 했지만, 드디어 난 몇 개월 만에 그래도 문명인다운 배변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무리 변기에서 일어서려고 해도 하체로 전혀 힘이 전달되지 않았다. 마치 허리부근에서 신경선이 모두 뚝 끊겨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자신감과는 달리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은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워커를 지렛대 삼아 일어나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이마에 땀만 비질비질 흐르고 조금 일어섰다 바로 주저앉기를 반복 하자 변기 속으로 내 앙상해진 엉덩이가 빨려 들어갈 것 만 같았다.

그 모습에 당황한 신입도 내 팔을 붙잡아 당겨보기도 하고 상체를 껴안고 일으켜 세워 보려고도 안간힘을 써봤지만 결국은 신입다운 사고만 치고 말았다.

무리하게 힘을 쓰다 나를 끌어안은 채 화장실 바닥으로 나자빠진 것이다. 

덕분에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나는 병원에서 두 번째 혼절을 경험했고 병원은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요주의 환자로 찍힌 나에게 더 이상의 병원 측 자비는 없어졌다. 재활실 방문도 원래대로 주 3회로 제한되었고 당분간 혼자서 워커를 사용해 병실 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금지되었다.

재활실의 제니 선생도 내가 친 사고 때문인지 이전과는 달리 훨씬 더 날 사무적으로 대했다. 

제니 선생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재활 자전거 페달을 말없이 밟고 있던 어느 날, 그녀가 다가왔다.


" 이 선생님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재활은 시간적인 순서에 맞게 하셔야 해요"

"안 다치셔서 다행이지만 저번처럼 마음대로 움직시면 절대 안 돼요"  


선생님의 꾸지람에 시무룩해진 초등학생을 타이르듯 그녀가 다시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학생을 달래주 듯 휠체어를 끌어 재활실 비상문을 통해 밖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병원 뒤편인 듯 보였다.

얼마 만에 보는 제대로 된 바깥세상인가!  

싱그러운 자연의 내음이 코를 찔러 온다!

새파란 잔디가 펼쳐져 있고 그위로는 일 년 내내 늘 푸른, 캘리포니아의 쪽빛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은 햇빛 좀 많이 쐬다 들어가세요"


그녀의 과분한 배려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광욕을 즐긴다. 

하늘엔 화가 마그리트가 그린 것 같은 뭉게구름들이 흘러 다녔고, 그 모습에 난 티베이 감옥에서 했던 경철이와의 지난 약속을 다시 떠올렸다.



그녀를 찾습니다 


주 6일의 강제노동이 끝나면 고대하던 휴일이 돌아왔다.  

휴일에는 날씨가 좋으면 이불보를 밖에다 널며 잠시나마 야외 휴식의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그날은 안 빨아도 된다는데 경철이가 굳이 내 이불보를 벗겨 빨래를 했고, 그 빨래를 말리며 경철이와 나는 오랜만에 밖에서 햇볕을 쐬며 한가로이 시간을 즐겼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본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은 새털구름들이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 이곳저곳을 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내 처지를 순간 잊어버릴 만큼 너무나 여유로운 그 모습에 가족들의 얼굴이 겹쳐 떠오른다. 

 

 ‘아내와 아이들은 잘 있을까? ‘

 

감옥에 오면 면회는 안 돼도 전화 한 통이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에겐 모든 게 불가능했다. 

그래도 얼마 전 브래드 영사가 힘써준 덕에 아내로부터 소중한 편지 한 장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글씨체에 아내의 체취가 확 묻어나고, 난 그리움에 그만 눈시울을 붉힌다.

 

힘들지? 말해 뭐 하겠어. 

그래도 꼭 잘 버터 줘. 우리 생각해서 ….

그리고 밖에서 당신을 위해 많은 후원자들이 힘을 보태고 있으니 힘내서 잘 견뎌.

좋은 드라마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뭐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일상에서 자기를 늘 생각해.  

그리고 매일 기도해. 우리가 아무 탈없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많이 보고 싶고 사랑하고 사랑해….

      

매일 밤 자기 전에 읽고 또 읽는 아내의 편지

느닷없이 중국 감옥에 갇혀 버린 남편,  그리고 2년째 연락 한번 못하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의 처지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삼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이불보를 뒤집어 탈탈 털어 빨래집게 하나 없이 기술적으로 다시 쇠철봉에 걸어 놓은 경철이가 다가와 묻는다. 

“가족 생각,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요. 힘내세요! 삼촌 “

“그래 고맙다. 근데 너는 가족 생각 안 나? 안 보고 싶어?”


“ 저야 뭐 ….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가끔 누이 생각은 나죠. 옛날처럼 또 굶고 있지는 않는지…”


시원한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펄럭이는 하얀 이불보들을 무심히 쳐다보며 경철이는 옛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내 감방동기 경철이의 고향은 북조선 함흥이다. 

교사로 일하던 어머니가 자궁암에 걸리면서 경철이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들었다는 고난의 행군 시절, 강냉이 죽도 못 먹는 판국에 어머니 수술은커녕 약 한 첩 구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평양 보위부 요원으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서둘러 함흥으로 올라와 가진 돈과 집까지 모두 팔아가며 아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손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이후 ‘이런 희망 없는 나라에서는 더 살 이유가 없다’며 국경 보위대에 파견된 동기를 찾아가 뇌물을 주고 탈북을 계획한다. 하지만 탈북을 앞두고 이전에 빌려준 돈을 받으려 갔던 아버지가 어이없게도 채무자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만다.

경철은 하는 수 없이 네 살 연상의 누이와 함께 원래 계획한 데로 탈북을 감행했고 중국 연길로 와 아버지가 미리 일러 주었던 조선족 친척을 만난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사실을 안 친척은 원래 약속과는 달리 경철이를 북한 출신 불법체류자들을 많이 고용하는 요녕성 선양시의 어느 가구 공장으로 보내 버린다.

경철이는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일을 하며 틈틈이 한국으로 가는 루트를 수소문한다. 그러던 중 그곳에서 같은 탈북자 출신 여자와 사귀게 되는데 그 해 겨울,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회사의 중국인 관리자에게 여자 친구가 겁탈당한 사실을 알게 된 경철이는 그만 몸싸움 중에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당황한 경철이는 바로 도주를 했고 무려 400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 중국 공안들을 피해 대련까지 숨어든다. 하지만 2주일 넘게 생고생을 하며 도착한 그곳에서 경철은 허무하게 체포되고 만다.     

칼날 같은 추위와 배고픔을 더 이상 참지 못한 경철은 선양에서 일할 때 탈북자들을 돕는 한인 교회의 기억에 무작정 십자가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한다. 


“국경을 넘어온 탈북자인데 먹을 것을 조그만 나누어 달라”는 그의 부탁에 중국 삼자 교회 한족 목사는 바로 공안에 신고를 했고 경철은 살인죄로 구속되고 변호사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에서 ‘의도적 살인죄’로 사형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만다.  

(사형집행유예는 사형선고 뒤 2년간 수형자의 반성 여부 및 태도 등을 고려해 징역형으로 감형해 줄 수 있는 중국만의 사법제도이다) 


근 10년이 넘는 고된 수감 생활은 많은 것을 ‘체념’ 하게 만들었고 이제 경철이에게 미래, 희망, 꿈 이런 단어는 먼 별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경철이는 다른 수감자처럼 출감날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는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면 바로 북한 국경수비대에 인계되어 교화소로 옮겨질 테고 그곳에서 잡혀온 탈북자 그것도 보위대 출신 반역자 가족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철이는 가끔 내게 꿈 얘기를 했는데 주로 그 교화소에 관한 것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들은 참혹한 교화소의 모습이 보이고 자신이 그곳에서 손에 피가 나도록 곡괭이로 언 땅을 파고 있거나 아니면 찾아온 누이가 이미 화장되어 버린 자신의 뼛조각을 손에 쥐고 울부짖는, 대게 그런 내용들이었다.


“삼촌 나가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실래요?”


가끔은 정 떨어지게 내가 사주는 반찬 하나도 쉽게 받지 않는 경철이가 웬일로 내게 부탁을 해온다.


“응, 말해봐. 할 수 있는 거면 해줄게” 

“혹시 남조선에 가시면...  탈북자 같은 사람도 쉽게 찾을 수 있을까요?”


“뭐 통일부도 있고 탈북자 단체들도 많으니까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왜?”


“사실 어제 꿈에 누이를 봤는데 아무래도 남조선에 있는 것 같아요.

다시 만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라도 알면 힘들게 찾으러 다니거나 애태우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또 삼촌 아니면 이런 부탁 가능한 사람도 이젠 못 만날 것 같고 ….”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렵게 입을 떼는 경철이의 누이는 사실 지금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생사여부도 확실치 않다. 탈북 당시 중국 화룡 근처에서 변경수비대에 발각이 되어 도망가는 와중에 그만 생이별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원래 약속했던 연길 친척집으로 안 온 것으로 미루어 경철은 지금까지는 내심 다시 북조선으로 잡혀가 죽었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 꿈에 누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속의 배경이 뜬금없이 자신이 사진으로 봤던 남조선이었다고 한다. 


“분명 남조선이 맞아요, 건물도 많고 차들도 많고 그리고 다, 조선말로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누이가 어떤 식당에서 일하는 것 같았는데, 설거지를 하면서 계속 남조선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나는 경철이 누이가 죽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살아 있기를 함께 소망하며 그의 부탁을 꼭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깨끗한 이불보에서 나는 상큼한 냄새 때문인지 아주 오랜만에 행복한 꿈을 꿨다.


막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어느 김밥집을 갔는데 경철이가 카운터에 그리고 그 누이가 옆에서 김밥을 말고 있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전혀 안 나지만 우리 테이블로 온 경철이 누이가 아내와 수다를 떨며 계속 깔깔대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김밥을 정신없이 집어먹고 있었던 것 같다.    




미국으로 추방되어 돌아온 난 그녀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의 여러 관련 기관 및 협회에 이메일을 보냈다. 

탈북자들이 많이 참석한다는 교회에도 연락을 취해봤다. 하지만 어느 한 군데에서도 회신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탈북자들은 일반적으로 북에 남은 가족과 자신의 신변위협 등의 이유로 남한에서도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과거를 쉽게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재활을 서둘러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경철이와의 이 약속 때문이다.

하루빨리 두 발로 일어서 서둘러 그의 누이를 수소문해 봐야 할 텐데....

내 몸은 왠지 내 마음 같지 않다.

지금이라도 당장 바람 따라 흘러 떠다니는 저 구름에 올라 한국으로 가 그녀를 찾아 동생 경철이의 소식을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젠 휴일이면 혼자 빨래를 하고 외로이 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경철이 생각에 울컥 그리움이 차올라 온다. 

 

                                                      함경남도 함흥 성천강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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