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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캇 리 Aug 12. 2024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혹시 ‘진선인’을 아십니까?

한 번의 울림이면 충분했다.

핸드폰의 알람이 울리자마자 이미 반쯤은 깨어있던 나는 잽싸게 알람을 끄고 나갈 채비를 한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옷가지와 담요가 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온다.

새벽 4시, 밖은 아직도 깜깜하다.

한 달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는 병원 측의 만류를 물리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은 보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불안 불안해 보이겠지만 이젠 혼자서도 식사, 샤워, 용변 웬만한 것은 모두 다 가능하다. 


퇴원은 했지만 나의 치료는 계속되었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던 탓인지 여러 장기가 원래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중 아직도 전혀 회복이 안되고 있는 장기는 심장과 신장이었다. 심장 기능은 정상인의 30프로만 남았다. 뛰거나 격한 스포츠를 해서는 안되고 앞으로도 좋아질 수는 없으니 지금 상태로만 잘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원래부터 격한 스포츠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이 나이에 그렇게 빨리 뛸 일도 없을 것 같아 그다지 낙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두 개의 신장이었다. 

응급상황에서 조영제 과다투여로 손상을 입은 신장이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안보였고 끝내 나는 말기 신부전증 환자로 판정받고 말았다. 말기의 경우 투석이나 신장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투석센터로 향한다.

아파트 정문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면 'OC ACCESS'라고 적힌 중형 버스가 도착한다.

족히 30명 정도는 탈 수 있을 것 같은 사이즈 이지만 안에는 좌석이 몇 개 없다. 널찍널찍 떨어진 좌석이 10개 남짓 있고 뒷공간은 모두 휠체어를 싣는 공간이다.

장애인들만을 위한 특별 버스인 것이다. 

신장 기능이 다시 좋아질 가능성이 제로인 나는 졸지에 장애인으로 등록되고 말았다. 

덕분에 'OC ACCESS' 같은 버스 이용권을 비롯해 장애인 주차증, 그리고 65세가 되어야 가능한 국가 의료혜택은 물론 사회보장 연금까지 매달 미리 수령받게 되었다. 게다가 나의 간호를 담당해 주는 아내에게도 간병인 임금이 별도로 지급되었다.

원치 않게 장애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생각지도 않게 경제적으로는 혼자 고생하는 아내의 짐은 크게 덜어 준 셈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저물어가는 '대국'이라고들 하지만 미국의 저력이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장애인의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먼저 하루 3시간씩 진행되는 혈액투석은 나를 매번 녹초로 만들었다. 

혈액투석은 저혈압, 두드러기, 가슴통증, 호흡곤란, 구토 등 여러 부작용을 동반하지만 그중 최악은 수시로 생기는 다리의 근육경련이었다. 

나는 TV에서 다리에 쥐가 나 고통스러워하는 축구선수들을 볼 때면 '운동선수가 엄살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곤 했다. 뭐 기껏해야 찌릿찌릿 정도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한 번도 다리에 제대로 된 쥐가 나 본 적 없던 나의 무지에서 나온 착각이었다.    

투석 중 다리 근육이 한번 뒤틀리기 시작하면 정말 수가 없었다. 다리를 부여잡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아무리 몸부림 쳐 봐도 고통은 계속되었다.

그 고통 때문에 센터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환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투석 후, 집으로 돌아오면 난 시체가 되었다. 암막커튼을 쳐놓고 햇빛을 두려워하는 관속의 드라큘라 마냥 하루종일 죽은 듯 잠만 잤다. 자는 도중에도 근육경련이 다시 찾아올 때면 이를 악물고 혼자서 침대 위를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었다.

잠에서 깨어날 때면 머리카락은 늘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이 계속됐다.

기능을 잃은 신장 다음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나의  뇌기능이었다.

"그 정도로 오래 누워 있었으면 분명 어딘 가는 고장이 났겠지" 라며 신경과 의사는 일단 나에게 치매약을 비롯해 몇 가지 뇌기능 개선약을 처방해 주었다.

내가 뇌 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인지한 것은 나의 두서없이 이빨 빠진 기억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형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왔다. 나는 당연히 형님과 어머님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음 방문한 것이라 생각하고 대충 집 소개를 했는데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아내가 '어머님이랑 형님 작년에 우리 집 다녀가셨잖아' 하며 내 옆구리 찔렀다. 

조금은 염려스럽게 나를 지켜보는 어머님과 형님의 모습에 난 순간 당황해 그만 말을 잃었다.

한 번은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던 옛 동료와 만나 제법 긴 시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니 그 친구가 기억이 안 나? 당신이랑 엄청 친했는데.... 5년 넘게 같이 일했는데?" 많이 황당해하는 옛 동료에게 뭔가 해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 그냥 멋쩍은 웃음으로 위기를 지나쳤다.

사실 옛 기억들이야 이미 흘러간 일이고 이젠 아내 말고는 같이 추억을 공유할 상대도 많지 않아 '언제 가는 다시 이빨이 맞혀지겠지' 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지만 요즘 보이는 또 다른 증세는 나를 심히 걱정시켰다 ,

나뿐만 아니라 아내의 신경도 그로 인해 많이 날카로워졌다.

심한 건망증이었다. 아내의 계속되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세수를 하고 수도꼭지를 그대로 틀어 놓고 나오고, 냉장고 문을 닫지 않고, 급기야 가스레인지 불을 끄지 않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가뜩이나 매일 피곤한 몸으로 퇴근하는 아내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걱정과 짜증만 나게 만드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스러웠다.

먹는 약으로도 별 호전이 안보이자 난 스스로 처방전을 내렸다.

계속 혼잣말로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면 라면을 끓일 때 다음으로 할 스탭을 계속 쉴 새 없이 혼잣말로 읊조리는 것이다 


"라면을 꺼내고..... 냄비에 물을 붓고..... 끊이고...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병원에 나가 봐야 할 때도 이런 식으로 읊조리며 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가면 여간해서는 실수가 없었다    


"가스레인지 불 확인하고.... 전등불 확인하고..... 열쇠 챙기고.... 현관문 잠그고 "


이런 식으로 말이다.


혹시 남들이 보면 조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어서 크게 신경 쓸 것도 없고 나름 효과도 있어 나는 갈수록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이상한 내 행동을 본 아내가 크게 역정을 냈다. 

오랜만에 듣는 아내의 큰소리였다. 그리고 자신의 화에 못 이겨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처지 때문인지 아내를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울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아내에게 무슨 변명이라도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이 퉁퉁 부어버린 아내를 침실에 혼자 두고 나는 그날 밤 거실 소파에서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밤새 뒤척였다.  

내 딴에 그래도 잘해 보려고 한 건데... 

내 정신도 내 몸 같이 분명 정상은 아닌 것 같아 서글퍼졌다.

억울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이 교차되던 그날, 쪽잠을 자며 난 뜬금없이 중국 간수소(구치소)에서 봤던 만길 씨를 다시 만났다.



혹시 ‘진선인’을 아십니까?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도를 아십니까’하며 접근하는 사이비 종교의 길거리 포교도 아니고 또, ‘진선인’은 뭐지, 진선미는 아는데… 같은 건가?… 

나를 잠시 헷갈리게 만든 사람은 얼마 전 우리 방으로 온 조선족 이 만길 씨다.

이마가 너무 길어 마치 삼류 SF 영화에 나오는 ‘콘헤드’ 외계인 같기도 하고 ‘합죽이’상 인 데다 간수소가 뭐가 그리 좋은 지 늘 웃고 다녀 안동 하회탈 같아 보이기도 했다.

생김새도 그런데 그는 지적 수준도 많이 떨어졌다. 지적 장애인인 듯 보였다. 

가끔 시청각 교육시간에 유교 경전의 효도, 사랑 등 하여간 부모님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엉엉 울어 댔다. 그리고는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스마일'이었다. 안 그래도 여러모로 다른 수감자들에게 타박받을 거리가 많은데 만길 씨는 게다가 ‘파룬궁’ 신자였고 체포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공산당의 교육이 무섭긴 무서웠다. 파룬궁을 말살시키기 위한 공산당의 선전에 길들여진 수감자들은 한족, 조선족 가릴 것 없이 파룬궁 신자 만길 씨를 비웃고 손가락질했다. 나이 오십이 넘은 그는 아들뻘 되는 놈들에게도 조롱감이 되었고 걸핏하면 엉덩이를 걷어 차이고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래도 한족에 비해 연장자를 대접해 주는 조선족들 조차도 ‘조선족 망신시킨다’는 이유로 그를 따돌리고 멀리했다.

 

그가 물어온 ‘진선인’(眞·善·忍)이란 진실·선량·인내를 핵심 사상으로 삼는 중국의 심신 수련법이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왜 저렇게까지 싫어할까' 싶은 ‘파룬궁’은 바로 그것을 통해 인격수양과 신체 단련을 한다.

파룬궁은 처음부터 중국 공산당에게 미움과 탄압을 받는 건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인민들의 문화생활 증진을 위해 장려하기도 했다. 창시자 리훙쯔는 그래서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 건강에 기여한 공로로 수 차례 표창까지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인기가 많아져도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도 '웰빙'이 트렌드가 되면서 수련자가 1억 명을 돌파하자 8천만 명의 당원을 가진 공산당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고, 청나라 말 ‘태평천국의 난’를 떠올리며 파룬궁을 사교 집단으로 낙인찍었고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파룬궁 탄압은 대륙스럽게 잔인하고 끈질겼다. 100여 가지 고문법을 사용해 수련을 포기하게 했고, 끝까지 버티는 자들은 산채로 장기를 적출해 사망케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박해와 탄압은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고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죽었는지는 중국공산당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실정이다. 

 

만길 씨는 ‘그래도 이방에서 제일 자신을 인간 대접해 준다’며 나에게 무척이나 친근하게 굴었다.

 

“이 사장, 노스트라다무스 알아요? 1999년 지구 종말 그거…”

 

“알긴 알죠, 그런데 이미 거짓말로 판명됐잖아요.”   

 

“아니, 아니지, 1999년 7월, 바로 장쩌민이 우리를 탄압하기 시작한 때지.”

 

그러니까 만길 씨 얘기는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에 나오는 1999년 7월 하늘로부터 출연한다는 공포의 대왕이 바로 장쩌민 전 주석이라는 것이었다. 조금은 어이없는 ‘풀이’ 긴 했지만 가끔 이럴 때 보면 그에게 지적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분명 남다른 능력이 있긴 했는데 일종의 예지력 같은 거였다.

 

그가 갓 왔을 때였다

방풍장(구치소 내 좁은 야외 휴식공간)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고 있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그가 도대체 누구 들으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계속 혼자 말을 해댔다.

 

“분명 여기였어, 잡혀 오기 전에 내 꿈에서 분명 여길 봤다니까요, 

저 담벼락도, 또 담벼락 너머 백양나무들도… 꿈속이랑 똑같아요 “   

 

그리고 만길 씨는 며칠 후, 꿈에 장백산(백두산)의 화산이 폭발해 도시가 잿더미로 변하고 양쯔강 물이 끓어올라 범람해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걸 보았다고 했다.

 

“분명 중국이 망하는 꿈이에요, 이제 중국 공산당도 얼마 남지 않은 거죠. 끝난 거죠”

 

비장함과 함께 약간의 고소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만길 씨는 ‘셀프 꿈 해몽’을 했고, 그리고 정말 다음날부터 뉴스에서는 본격적으로 우한의 코로나 사태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저거 보세요, 내 꿈이 맞죠” 

 

하루하루 불어 나는 사망자수를 지켜보면 만길 씨는 많이 흥분했다. 하지만 그의 꿈과는 달리 전 세계에 병균을 퍼트린 중국 공산당은 정작 방역에 성공해 사망자 수를 점차 줄여 갔고, 도리어 미국이 하루에 수 천 명씩 사망자를 쏟아 내며 멸망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만길 씨의 흥분은 곧 가라앉았지만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는 가족 걱정에 매일 노심초사했다. 

 

하루는 만길 씨가 나에게 꿈 해몽을 부탁한 적도 있다. 자신의 이가 몽땅 빠지고 피가 나는 꿈을 꿨다고 했다. 어디선가 들은 내 지식으로는 그런 꿈은 부모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암시하는 흉몽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팔십이 넘은 중풍 환자, 아버지를 홀로 두고 잡혀 와 식사 때마다 아버지 걱정에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그런 해몽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만길 씨는 이곳에 잡혀 오기 전, 국수 공장에 다니면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혼자 돌본 효자였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아내는 소식이 끊겼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시중을 하시다 도리어 먼저 암으로 2년 전쯤 돌아가셨다고 했다. 스무 살 먹은 아들이 하나 있긴 한데 아버지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이유로 집과는 발을 끊은 지 오래라고 했다. 

만길 씨는 파룬궁 전도요원이었다. 작은 돌에 파룬궁 전도지를 둘둘 감아 새총을 이용해 새벽에 공원의 나무 위에 걸어 놓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렇게 해 놓으면  공원을 찾는 방문객들 발등에 그 돌이 떨어질 테고, 그 돌을 우연히 주운 방문객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돌에 감긴 전도지를 펼쳐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파룬궁에 빠진다는, 참! 만길 씨 다운 전도 방법이었다.

그 방법으로 얼마나 많은 신자를 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만길 씨는 직장 동료에게 그 사실이 탄로 나 잡혀 오게 됐다.

 

우리 아버지 밥은 누가 챙겨 주겠죠?

공안에서 우리 누이에게 연락은 했겠죠? 

그런데 왜 누이는 영치금을 안 넣어주지?

 

만길 씨는 궁금한 게 많았다. 하지만 돈도 뺵도 변호사도 없는 그가 밖의 아버지에게 또 한국에 있다는 누이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가끔 복도로 난 창문의 쇠창살에 얼굴을 붙이고 지나가는 관교(중국의 교도관)에게 간곡히 부탁도 해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았다.

 

“아니,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 하네, 관교가 어떻게 수감자 가족하고 연락을 해! 

누구 옷 벗는 꼴 보고 싶어”

 

어제 아침에도 스무 살짜리 한족 수감자에게 밖에서 가족이 보내온 만두를 배달했던 그가 심히 역정을 냈다. 

밖에 계신 그의 아버지 안부를 알 길이 없으니 그의 꿈에 내가 알던 해몽이 맞는 건지 안 맞는 건지 확인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 그의 꿈은 어떤 식으로 던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기는 했다.

 

“이 사장 어떡하지, 나 좀 도와줘”   

 

그날 저녁, 만길 씨는 울상이 되어 화장실에서 나를 급히 찾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정말 그의 이가 다 빠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만길 씨는 어릴 때 열병을 앓아 원래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가 ‘합죽이'상이었던 건 위아래 모두 틀니였기 때문이다. 매일 저녁 방장의 허락을 받고 혼자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틀니를 청소했는데 그날 그만 칫솔로 닦던 아래 틀니가 변기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수감실 화장실은 너무 좁아 그냥 재래식 중국 변기만 두 개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세수를 할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빨래를 할 때도 모두 그 변기 위에 서서 하거나 대야를 받쳐 놓고 했다. 그래서 나도 경험해 봤지만 세숫비누나 칫솔을 실수로 놓치면 여지없이 자동으로 변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반은 재래식, 반은 수세식인 이 오래되고 이상한 변기는 아래쪽에 보이는 파이프가 밖의 정화조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배설물을 밖으로 보내려면 바가지로 물을 퍼서 쏟아부어야만 했다.

만길 씨의 틀니는 그 녹슨 파이프 통로에 오물 찌꺼기들과 함께 걸려 있었는데 문제는 그 통로가 너무 좁다는 것이었다. 만길 씨는 틀니를 되찾기 위해 그 통로에 팔을 쑤셔 넣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려 봤지만 야속한 틀니는 끝내 손에 닿지 안 않고 애꿎은 그의 팔뚝만 여기저기 긁혀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되었다.

아무리 왕따인 만길 씨지만 수감자들이 보기에도 그 모습은 너무 안타까웠던지 서로 꺼낼 방법을 같이 궁리하다 여의치 않자 담당 관교를 호출해 주었다.

 

“에이, 이거 무슨 도구가 있어야 꺼낼 수 있겠는데…”

 

들어올 때부터  짜증스러워하던 담당 관교가 도구라고 가져온 건 밖에서 주워 온 얇은 나뭇가지 하나였다.  손전등을 비추고 나뭇가지로 통로에 낀 틀니를 툭툭 쳐 대던  관교가 순간 당황하고 만다.

 

“어…어…어.. 이거 어떡하지”

 

어째 불안 불안하더니 통로에 걸려 있던 틀니가 그만 ‘쏙’, 파이프를 타고 정화조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만길 씨는 더 이상 자신의 틀니가 보이지 않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아.. 괜찮아, 괜찮아, 

내가 밖에 연락해서 틀니 만드는 치과 의사 불러올 테니까.  

울지 마, 그래 울지 마.

알았지, 알았지 

 

관교는 연신 OK 사인을 손가락으로 만들어 보여주며 울먹이는 만길 씨를 달랬다. 나도 그랬지만 수감실 모두관교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만길 씨만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약속을 믿고 있는 눈치였다.

 

“코로나 때문에 여태 의사가 못 들어와 그런데요 

다음 주부터 간수소 면회도 다시 된다니까, 내 틀니도 곧 오겠죠, 하하하 “ 

 

한 달 넘게 틀니가 없어 씹질 못해 밥을 물에 마셔 먹는 모습에 내가 ‘힘들지 않냐’고 묻자 그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회탈 웃음은 보이며 그렇게 답했다.


“공안 형사가 장기 적출한다, 뭐 한다 협박해서 무서워 그런 건 아니에요.

불면 일단 내보내는 준다 하니까…

제가 빨리 못 나가면 밖에 혼자 있는 울 아버지 진짜 죽어요, 죽어! 

저도 미안하고 죄스럽죠.”


내가 감옥으로 이송되기 전, 자신 때문에 줄줄이 굴비로 8명의 신자가 간수소에 잡혀 왔다는 소식에 많이 죄스러워하던 만길 씨의 마지막 모습이 꿈속에서 다시 보였다.


 

OC ACCESS 장애인 전용 버스 

                                 

뉴욕 유엔본부 인근에서 파룬궁 박해를 알리며 평화시위를 하고 있는 파룬궁 수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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