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소설 ‘좀머 씨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2차 대전 직후, 독일의 어느 시골 호숫가 근처에 사는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비친 세상 이야기였는데 일종의 동화 같은 성장소설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좀머 씨는 추측컨대 'PTSD' 같은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아무 말 없이 하루 종일 빠르게 마을과 호숫가 주변을 계속 걷어 다니는, 그런 약간은 기묘한 캐릭터였다.
요즘 내 모습이 그 좀머 씨를 조금 닮아 보인다.
투석을 쉬는 날이면 나는 아내가 출근하자마자 어김없이 텀블러에 커피를 담고, 운동화 끈을 최대한 졸라매고 집 근처의 '크레이그 공원'으로 향한다.
집에서 도보로 10분 안팎의 거리에 이런 훌륭한 공원이 있다는 건 네게는 큰 행운이었다.
야구장, 농구장, 배구장 등 스포츠 콤플렉스를 지나면 공원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아담한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청둥오리, 거위 등의 조류들이 그 호수 위를 유유자적 헤엄치고 있고 주변의 푸른 잔디 위에는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청설모들이 뭐가 그리 바쁜지 나무 위를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공원은 한산하다.
집에서 이 호수 중앙까지 오는데 대략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예전처럼 뛸 수는 없지만 최대한 빠른 걸음걸이로 전력 질주(?)를 한 탓에 제법 땀이 나고 숨이 가빠온다. 꾸준한 산책 덕인지 하여간 앙상하게 뼈만 남았던 다리에도 근육은 아니지만 이제 꽤 살집이 붙었다.
나는 산책코스의 반환점인 호수 바로 앞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손가락을 마사지한다.
이제 햇수로는 3년이 넘은 것 같은데 중국 감옥에서 얻어 온 이름도 이상한 이 손가락 질환은 좀처럼 낫질 않았다. 손가락을 구부리거나 펼 때 통증을 느끼는 '방아쇠 수지 증후군'이라는 병인데 강제노동의 흔적이다.
사실 그곳에서 내 작업은 다른 죄수들의 것보다는 쉽고 간단한 편이었다.
장춘 공장에서 생산하는 폭스바겐 자동차 안에 들어가는 전선들에 그냥 검은색 절연 테이프를 칭칭 감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짓도 하루 온종일 그것도 주 6일씩 하다 보니 손목 관절에 이상이 오고 손바닥은 늘 절이고 손가락은 쉽게 쥐락펴락 하기조차 힘들어졌다.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당시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던 우리 8대대 소속 98명의 수감자들은 거의 비슷한 꼬락서니였다. 대부분 손으로 하는 장시간의 노동으로 인해 손바닥은 전부 나무껍질 같았고 특히, 10년 가까이 이 노동에 시달린 경철이 같은 경우 손가락 마디마디가 붓고, 튀어나오고, 뒤틀리고 흡사 공포영화에 나오는 괴물의 것을 연상케 했다.
한화로 채 2천 원도 안 되는 중국돈 10위안 남짓한 월급을 받는 대가였다.
이제 그만 잊고도 싶은데 퉁퉁 부어 있는 손가락을 볼 때마다 그곳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소환된다.
매일매일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종이 치며 밥을 먹고 또 종이 치면 잠자리에 드는 그런 무기력했던 노예의 삶...
그때는 끝없이 반복되는 그 시간들로 인해 원래 그것이 나의 삶이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미 감옥을 떠난 지 오래된 지금도 나는 소설 속 좀머 씨처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좀처럼 헤어 나오질 못하는 것 같다.
'몸이 가난을 기억한다'는 말처럼 정신뿐 아니라 내 몸도 무의식 중에 그곳 생활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 적잖이 놀랄 때가 많다.
신장 때문에 얼마 나오지도 않는 소변을 밤새 억지로 꾹 참고 새벽이 되어서야 바로 방옆의 화장실을 찾는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딱 세 번만 사용이 가능했던 티베이 감옥의 화장실, 내 몸은 미련하게도 아직까지 '야만의 끝'이었던 그 푸세식 화장실에 타이머가 맞혀져 있는 것 같았다.
감옥에서는 늘 바깥 꿈을 꿨었다.
꿈속에서는 지인들과 신나게 골프를 치기도 하고 가족들과 즐겁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물론 꿈의 뒷부분은 언제나 작업장에 쌓여 있는 일감 걱정에 숏 퍼팅을 놓치거나 아니면 식사 후, 홀로 감옥의 낡은 침대로 다시 돌아오는 그런 찜찜한 내용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요즘 내 꿈은 어찌 된 일인지 감옥 담벼락 자체를 넘질 못한다.
꿈속의 배경도 늘 감옥이고 등장인물도 모두 내가 간수소나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다.
꾀제제한 모습의 경철이, 알리, 옆방 홍콩인 에드몬드 감옥 입관대에서 만났던 탈북자 명철이, 솔이...
간수소에서 같이 지냈던 LA레이커스 광팬 짱리민, 택시 운전사 웨이치, 탈북자 브로커 왕 씨, 조선족 만길 씨...
파노라마처럼 늘어선 그들이 단체로 출연할 때도 있고 에피소드에 따라 별도 출연할 때도 있지만 하여간 내 꿈속의 배우들은 그들뿐이었다.
아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나는 하루종일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말할 상대가 없기도 하지만 병원을 오가면서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
오늘도 묵언수행을 하듯 잰걸음으로 말없이 공원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소설 속 삽화의 좀머 씨를 떠오르게 한다.
순간, 참 그런데 좀머 씨는 어떻게 되었더라?
오래전 읽은 책이라 가물가물 하지만 아마 아내가 죽자 스스로 호수에 빠져 생을 마쳤던 것으로 기억된다.
Escape from 'Mad China'
장애인 버스 'OC ACCESS'는 다 좋은데 합승을 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투석센터처럼 새벽시간이거나 단거리인 경우 별 문제가 없는데 오늘처럼 어정쩡한 시간에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는 중간중간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 애를 먹는다.
승객 대부분이 휠체어 신세를 지는 장애인들이라 매 STOP 마다 운전기사가 직접 휠체어를 올려주고 내려줘야 한다. 보호자나 간병인이 따로 없는 경우에는 운전기사가 집 안까지 승객을 모셔다 주고 나서야 다시 핸들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제일 처음 신장 이식을 성공했다는 UC 어바인 (Irvine) 대학병원에 왔다. 'OC ACCESS' 타고 온 이곳이 바로 내가 신장 이식 수술을 받기로 한 병원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일단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내 순서가 되면 그때 기증된 신장을 이식받게 된다.
대기 기간은 평균 5년~8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인 그러니까 기증자 대다수가 아직도 백인이 많아 나와 같은 B형 혈액형이 적은 이유로 나의 대기기간은 8년 ~10년 정도로 예상해야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졸지에 진짜 나쁜 B 형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대기기간도 기간이지만 나에겐 넘어야 할 산이 또 하나 있었다. 이식수술 자체를 견디어 낼 수 있는지 몸 상태를 먼저 체크해야만 했다.
덕분에 '뉴클리어 카디악 스트레스 테스트'를 비롯해 초음파, MRI, 피검사 등 하여간 이런저런 검사로 이 큰 대학병원의 병동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더니 몸은 이내 녹초가 되고 말았다.
검사 결과는 일주일 후에나 알 수 있다고 했고 대기순서가 올 때까지 매년 이렇게 검사를 받아 이상이 없어야 이식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내 신장전문의 닥터 레디와의 관계 때문인지 앞으로도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 가능한 수술 과정을 미리 설명해 주기 위해 같은 인도계 그리고 성도 같은 '레디'라는 또 다른 닥터가 들어왔다.
'한국의 김 씨나 이 씨처럼 인도에선 굉장히 흔한 성씨죠'
그렇게 닥터 레디 2는 조금은 의아해하는 나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주고 자신의 한국계 고교 동창들 얘기와 작년에 방문했던 한국여행에 대해 자랑했다. 그리고는 본업으로 돌아와 나에게 신장이 망가진 이유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나의 짧은 답변에도 불구하고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덕분에 의도하지 않게 중국에서 겪었던 일부터 지금의 상태까지 제법 긴 스토리를 다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좀처럼 남에게 말하기 꺼렸던 과거를 '의사'라고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 앞에서 술술 풀어내고 있는 내 모습에 놀랐고, 또 내 얘기를 듣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분명 신이 함께 할 것'이라며 내 손을 덥석 잡는 그에 행동에 또 한 번 놀랐다.
그가 말한 신이 어떤 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에겐 왠지 모르게 큰 힘이 되는 응원으로 다가왔다.
그날 닥터 레디 2는 그가 직접 집도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먼 미래의 이식수술의 대해 하여간 너무나 친절히 그리고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또 승객을 내린 뒤 덜컹 거리며 다시 출발하는 버스의 움직임에 잠을 깬다.
몰려오는 피곤함과 한없이 늘어지는 귀갓길에 나는 차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이 버스처럼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버스 옆으로 어디로 가는 건지 몰라도 구닥다리 화물 열차가 제법 기차 같은 소리를 내며 오래된 선로 위를 내달린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 가는 기차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내 또 잠에 빠져든다.
방금 지난 간 기차선로 옆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쑥 모습을 나타낸다.
리어카를 필두로 몇 명의 사람들이 선로 옆 자갈밭의 쓰레기를 줍고 있다.
모두 다 아는 얼굴이다.
앞에서 리어카를 끄는 경철이가 보이고 그 뒤로는 오렌지색 안전조끼를 입은 알리, 명철이, 솔이가 보인다.
꿈은 또 이어진다.
팜트리(palm tree)가 도로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다.
팜트리를 봐서는 분명 이곳 캘리포니아 같은데 이상하게 사방이 중국 한자 간판들 일색이다.
자세히 보니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 살았던, LA 근교 중국 타운 ‘알함브라’ 시의 어느 쇼핑센터다.
난 뜨거운 햇빛을 피해 어디론가 들어갔는데 과일 가게인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서 짱리민이 오렌지를 팔고 있었다.
녀석은 영구결번이 된 코비 브라이언트의 24번 LA레이커스 저지를 입고 있었다.
쪽잠 속의 꿈은 계속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쇼핑몰 안의 딤섬 레스토랑의 주인은 홍콩 사람 에드몬드였고 내가 부른 우버차량의 운전석에는 중국택시기사 웨이치가 앉아 있었다.
등장인물들은 같았지만 그 배경은 더 이상 중국이 아닌 미국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꿈에서 깬 나는 이젠 나의 무의식도 비로소 그 힘들고 어두웠던 중국 감옥의 철창문을 열고 나온 것 같아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쥐스킨트의 대표작 좀머 씨 이야기 UC 어바인 대학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