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캇 리 Aug 30. 2024

에필로그 /다시 St. Jude 병원으로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2년 만에 다시 찾은 병원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

여기서 생과 사를 오가며 그렇게 많은 날을 보냈는데 마치 처음 와 본 장소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지금처럼 병원의 정문을 통해 이렇게 로비로 들어온 적이 없어 그런 것 같다.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로 곧바로 들어갔을 테고 재활병원으로 옮겨질 때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이문은 통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한번 죽었다 깨어났던 St. Jude(세인트 쥬드) 병원을 다시 찾은 이유는 복막 투석을 위한 수술을 받기 위해서다.

작년에도 혈액 투석을 위해 겨드랑이부터 팔꿈치 안쪽까지 살을 열고 인공혈관을 집어넣는 수술을 받긴 했는데 거기는 생전 처음 가보는 병원이었다.

인공혈관을 삽입하면 보통 3년~5년 정도 사용이 가능한다고 했지만 나는 2년을 못 채우고, 팔뚝에 켈로이드 같은 크고 깊은 수술 흉터만 남긴 채 그 인공혈관을 포기하기로 했다.

혈액투석을 하면 몸에 전체적인 무리가 와 여러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만 체중관리만 잘하고 몸이 적응되면 그럭저럭 견딜만한다고 들었는데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체중은 항상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먹는 것도 식단대로 잘 지켰지만 왠지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근육경련이야 이를 악물고 사라질 때까지 어떻게든 견디어 볼 수 있었지만 투석 중 온몸에 삽시간에 올라오는 두드러기와 그로 인한 호흡곤란은 문제가 달랐다. 

투석액부터 투석관 그리고 나중에는 인공투석기를 통째로 바꿔 보기도 했지만 두드러기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호흡곤란은 점점 정도가 심해져 걸핏하면 산소마스크 신세를 져야 했다. 

이런 상태로는 이식수술을 위한 대기 기간을 견디어 내기는커녕 당장 다음번 투석에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태가 계속되자 닥터 레디는 내게 복막투석을 권해왔다.

매일 하루에 10시간이란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몸에 무리가 덜 가기 때문에 지금의 나에게는 최선의 차선책이라고 했다.


복막투석을 위해 먼저 배에 구멍을 뚫어 복강으로는 이어지는 '카테터'라는 도관을 심는 수술을 받기 위해 나는 이곳을 다시 찾았다.

넓고 깨끗한 로비에 앉아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린다.     

로비 안내 데스크 뒷면을 꽉 채우고 있는 대형 청동조각판이 눈에 들어온다.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푸른빛이 도는 조각판에는 마태복음 11장 28절의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 병원의 설립 이념도 짤막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이름에서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제야 이 병원이 믿음에 기반한 비영리 병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보험이 없으면 맹장수술비가 한화로 2억에 육박하는 어마무시한 미국의 병원비.

그런데 난 이곳에서 온갖 첨단장비와 미국 내에서도 톱으로 손꼽히는 의료진들에게 수술과 치료를 무려 2달 가까이 받았으니 아내 말대로 정말 6백만 불의 사나이쯤 될 것 같다.


중국에서 추방되어 보험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병원 측에서는 자신들이 직접 각종 정부 및 민간 혜택을 찾아 병원비를 충당했고 덕분에 아내는 1달러도 내지 않고 퇴원 수속을 마쳤다며 늘 감사해했다. 그리고 이번 수술비용도 이미 백 프로 커버된 상태이다. 그  때문인지 청동판의 성경구절이 오늘따라 제대로 가슴에 꼽혀온다. 

   

병원 스탭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수술실로 이동한다.

오랜만에 맨 몸에 뒤만 트인 시원한 병원 가운을 다시 걸친다.

한국계 인 듯 보이는 마취과 의사가 다녀가고 몸이 붕 뜨는 듯싶더니 이내 꿈속으로 빠져든다.


크레이그 공원의 내 지정석, 호수가 앞 벤치다.

호수는 하늘, 구름, 나무 등 주변의 모든 것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찍어 담아내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내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내  옆에는 그분도 앉아 있다. 

여전히 허름한 붉은 망토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흔들리는 물결 때문에 조금은 흐릿하지만 분명 그분이 맞다.  

내가 이곳 St. Jude에서 코마상태를 헤어나질 못할 때 나를 찾아와 주었던 그분이다. 사실 그분을 처음 본 것은 이곳이 아니라 티베이 감옥에서부터였다.   St. Jude  St. Jude  St. Jude


그때 나는 며칠째 먹지도 못했지만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었다. 

두꺼운 솜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자리에 누웠건만 추위에 계속 몸은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물에 적신 꼬질꼬질한 수건을 목에 감고 벽에 기대어 앉아 기도를 하다가 무심히 창밖을 내다봤는데 맞은편 신축 아파트 어디선가 옅든 불빛이 새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창가 쪽에 기대어 선 듯한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대부분의 중죄인 감옥은 일반인의 접근이 용이치 않은 외곽지역에 있기 마련인데 티베이 감옥은 신축 아파트 단지에 삥 둘러 싸여 있었다. 물론 감옥을 지을 때는 여기도 주변이 허허벌판이었겠지만 세월이 가면서 장춘시가 점점 팽창해 티베이 감옥은 이젠 도심 한 복판에 있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분명 아직 아무도 입주하지 않은 시멘트뿐인 아파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자체도 이상한데 실루엣은 마치 내가 보고 있는 걸 아는 듯, 미동도 없이 한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그 역시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짧게 실내등이 켜지고 난 붉은 망토를 걸친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그분이 두 팔을 버린 채 서 있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리고 내가 감옥 의무대에 실러 갔을 때도, 이곳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그분은 지금처럼 내 옆에 모습을 보여주셨다.

비록 아무 말은 없었지만 난 그분이 누군지 또 왜 내 옆에 계셨는지 가슴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멈추었는지 호수의 물결이 이내 잠잠해진다. 그리고 몽롱했던 내 정신이 조금씩 깨어난다.

언제나 그랬듯이 눈을 뜨면 아내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인다.


"괜찮아? 이제 정신 들어?"  


회복실에서 깨어난 나의 시선은 걱정 어린 아내의 질문을 뒤로하고 아내와 함께 온 막내 놈을 향한다.


"아빠 괜찮은 거지?"  


엄마 아빠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공안에 체포되는 모습에 그만 울음을 터트렸던 초등학생 꼬맹이가 어느새 이젠 아빠보다 큰 키의 12학년(한국의 고3)이 되어버렸다.

생각해 보니 떨어져 있던 큰 놈과는 달리 우리 가족의 이 고난과 시련을 막내 놈은 온몸으로 함께 겪어 낸 것 같아 순간, 정말 많이 미안하고 가슴이 많이 아파왔다.

중국에서의 힘든 옥바라지 때도, 엄마와 둘이 미국으로 와 남의 집 방한칸을 빌려 고생할 때도, 그리고 돌아온 내가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도 막내 놈은 아내와 함께 고스란히 그 충격과 고통을 흡수했을 테니 말이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몇 달 전 아내는 나에게 이곳에서 유명한 대형 한인교회에서 열리는 금요집회에 가보자고 졸랐다.

비록 오십 명 정도의 작은 크기지만 미국으로 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는 우리 교회를 놔두고 다른 교회를 가보자는 말은 처음이라 조금은 의아스러웠다. 더구나 아내는 우리 교회에서 주일은 물론 매주 금요예배의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어 더욱 그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가 반주까지 빠져가며 나를 그 대형교회에 데려간 이유는 '치유집회'때문이었다.

아내는 그 교회에 출석하는 지인들이 하도 졸라대서라고 둘러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는 남편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을 것 같다. 


아내의 부축을 받고 들어선 대형 교회의 대강당은 이름에 걸맞게 정말 컸다.

크기도 크기지만 방송국에서나 사용하는 지미집 ( jimmy jib) 카메라를 비롯 각종 최첨단 영상 및 음향장치가 돋보였고 극장에 있는 것만큼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는 우리 교회의 딱딱한 접이식 의자와는 천지차이였다. 하지만 그 고급 좌석 때문에 두 시간이 넘는 집회는 어떻게 던 잘 견디었지만 사실 소득은 없었다.    


한국에서 환자치유로 유명하다는 초청 목사님은 간단히 설교를 마치고 본격적인 치유작업에 들어갔다.


"목 디스크 있는 사람 나와 봐!" 

"허리 안 좋은 사람 나와 봐! 다리 안 좋은 사람 나와 봐! "

좌골 신경통, 류머티즘, 안구 건조증 등등 치유경험이 많아 그런지 병명도 정말 다양하게 알고 계셨다.

그리고 목사님은 단상 앞으로 나온 수많은 각종 질환의 환자들을 세우고 눕힌 상태에서 치유의 기적을 행했다. 눈이 안 좋은 사람은 눈을 비벼 주고 목이 안 좋은 사람은 고개를 좌우로 꺾어 주었다. 

안 좋다는 부위를 일일이 만져주고 목사님은 기도를 하며 놀랍게도 주님과 실시간 소통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 지금 주님이 고쳐주고 계십니다!

이젠 눈은 다 고치셨고 목 디스크를 고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치유기도가 끝나자 일일이 돌아가면 상태를 물었다. 


"어때요? 이제 다 고쳐졌죠! 목을 좌우로 움직여 보세요! 할렐루야!"


내가 보기에는 질문이라기 하기는 좀 애매해 보였는데 어쨌든 치료받은 사람들은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정말 완치가 되었는지 모두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고 서둘려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회가 다 끝나가도록 나는 단상 앞으로 나갈 기회조차 없었다.

목사님이 심장이나 신장 같은 장기 관련 질환은 호명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조해하던 아내는 예배당을 떠나려는 초청 목사를 잽싸게 쫓아갔다. 하지만 이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남편을 위해 별도로 안수기도를 부탁드렸는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거절을 당한 것 같았다.


나를 힘겹게 부축하며 주차장으로 다시 나오는 아내에게서 오랜만에 눈물을 보았다.


"괜찮아, 난 괜찮아" 


사실 괜찮지 않은 건 아내인데 바보같이 위로랍시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젠 허리까지 점점 안 좋아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갈수록 그녀에게 짐이 되는 같아 서글퍼지는데 대형 교회 주차장은 왜 또 그리도 넓은지.... 아내를 볼 면목이 더 없어지던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날 안수기도를 받기는 받았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본 아내의 지인들이 교회 담당목사님에게 졸라 숙소로 돌아가려는 초청 목사님을 마지막 순간에 잠시 붙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미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목사님에게 아주 짧게나마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내 믿음이 부족해서 인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도 이미 예상했는지 낙심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다시 씩씩하게 자신의 하던 일을 열심히 해나가기 시작했다.

아내는 사실 내 병과의 싸움이 금세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미 장기전에 대비해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이행해 가고 있는 중이다.

아내는 공장일을 하면서도 밤을 새워가며 지난 2년간 공부에 매진해 얼마 전 간호학교를 졸업했고 국가고시에도 한 번에 합격해 이젠 병원에서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보수를 받으면 전문 의료인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더 높은 학위를 따기 위해 집에 오면 간호복을 벗기가 무섭게 다시 온라인 강의를 듣는다.

갑자기 가장이 되어버린 아내는 경제적인 면과 나의 길어질 병간호를 위해 평생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 커리어를 중년이 넘은 나이에 과감히 선택했다. 미국에서는 높은 연봉도 연봉이지만 전문 간호사들의 수요가 많이 부족해 본인이 건강만 허락하면 팔십 살까지도 병원에서 근무가 가능하다는 점도 그녀의 결정에 큰 이유가 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 배우가 아들을 바라보면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아내뿐만 아니라 아들 녀석들도 나의 길어질 투병 생활을 대비해 그 영화에서 처럼 모두 다 이미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큰 아들놈은 내가 공안에 잡혀 갔을 때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옥바라지를 해야 하는 엄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이 터지자 바로 휴학을 하고 미국시민권자임에도 한국 군대에 자진 입대했다. 신병 훈련소부터 고아처럼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는 그런 외로운 군생활을 홀로 이겨 냈을 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데 녀석은 또 군대를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고 미국대학으로 편입한 녀석은 학교 ROTC에 입대해 졸업과 동시에 미군 장교로 복무하기로 이미 결정했다. 

"전 아무래도 군 체질인가 봐요"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늦잠 자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녀석이 다시 군대로 향하는 이유는 미군의 커진 입대 보너스도 보너스지만 집안에 부담을 주지 않고 바로 안정적인 직업을 잡아 엄마의 짐을 덜어 주려는 장남의 마음인 것 같다.  

형을 따라 공대에 진학하려던 막내 놈은 나 때문인지 아니면 엄마의 영향 탓인지 하여간 마음을 바꿔 의학 쪽으로 진로를 수정 대학입시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연이은 집안의 우환으로 한창 예민할 때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공부도 곧 잘하며 무난하게 잘 자라주었다. 한밤중에도 내 기침 소리가 나면 "아빠 괜찮아?" 하며 내방 문을 빼꼼히 열어 안부를 확인하는 배려 깊은 막내가 되어 있었다.


결코 쉽진 않았지만 아무튼 우리 가족은 이제 얼추 광야를 다 지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 고난의 길을 지나오는 동안 우리 가족은 정말 많이 힘들었고 세상적으로 보면 참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담금질된 우리 가족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워졌고 그래서 더 행복하다. 


아직 내 병은 치료되지 않았지만 나는 확신한다. 

비록 말은 없으시지만 지옥 같은 감옥에서 그리고 깊은 죽음에서도 나를 건져주신 주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젠가 내 몸이 나아지면 나를 통한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계심을... 


"감염만 없이 잘만 관리하면 낮에는 정상인처럼 활동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닥터 레디의 말이 떠오른다.


복부에서 기다랗게 연결되어 나온 도관을 꼼꼼히 소독하고 병원에서 보내준 복막투석기기에 조심스럽게 연결시킨다. 투석액이 배속으로 주입되면 맹꽁이처럼 배가 불러오고 그 액이 빠져나가면 다시 배가 홀쭉해지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밤새 계속되고 순간순간 아랫배에 불편한 압력이 가해져 오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하다.


내일 아침에는 다시 정상인 비슷하게라도 깨어나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남편이 될 수만 있다면 이쯤이야 뭐.. 


St. Jude(세인트 쥬드) 병원
성경 마태복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