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몇 달 전 아내는 나에게 이곳에서 유명한 대형 한인교회에서 열리는 금요집회에 가보자고 졸랐다.
비록 오십 명 정도의 작은 크기지만 미국으로 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는 우리 교회를 놔두고 다른 교회를 가보자는 말은 처음이라 조금은 의아스러웠다. 더구나 아내는 우리 교회에서 주일은 물론 매주 금요예배의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어 더욱 그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가 반주까지 빠져가며 나를 그 대형교회에 데려간 이유는 '치유집회'때문이었다.
아내는 그 교회에 출석하는 지인들이 하도 졸라대서라고 둘러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는 남편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을 것 같다.
아내의 부축을 받고 들어선 대형 교회의 대강당은 이름에 걸맞게 정말 컸다.
크기도 크기지만 방송국에서나 사용하는 지미집 ( jimmy jib) 카메라를 비롯 각종 최첨단 영상 및 음향장치가 돋보였고 극장에 있는 것만큼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는 우리 교회의 딱딱한 접이식 의자와는 천지차이였다. 하지만 그 고급 좌석 때문에 두 시간이 넘는 집회는 어떻게 던 잘 견디었지만 사실 소득은 없었다.
한국에서 환자치유로 유명하다는 초청 목사님은 간단히 설교를 마치고 본격적인 치유작업에 들어갔다.
"목 디스크 있는 사람 나와 봐!"
"허리 안 좋은 사람 나와 봐! 다리 안 좋은 사람 나와 봐! "
좌골 신경통, 류머티즘, 안구 건조증 등등 치유경험이 많아 그런지 병명도 정말 다양하게 알고 계셨다.
그리고 목사님은 단상 앞으로 나온 수많은 각종 질환의 환자들을 세우고 눕힌 상태에서 치유의 기적을 행했다. 눈이 안 좋은 사람은 눈을 비벼 주고 목이 안 좋은 사람은 고개를 좌우로 꺾어 주었다.
안 좋다는 부위를 일일이 만져주고 목사님은 기도를 하며 놀랍게도 주님과 실시간 소통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 지금 주님이 고쳐주고 계십니다!
이젠 눈은 다 고치셨고 목 디스크를 고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치유기도가 끝나자 일일이 돌아가면 상태를 물었다.
"어때요? 이제 다 고쳐졌죠! 목을 좌우로 움직여 보세요! 할렐루야!"
내가 보기에는 질문이라기 하기는 좀 애매해 보였는데 어쨌든 치료받은 사람들은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정말 완치가 되었는지 모두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고 서둘려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회가 다 끝나가도록 나는 단상 앞으로 나갈 기회조차 없었다.
목사님이 심장이나 신장 같은 장기 관련 질환은 호명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조해하던 아내는 예배당을 떠나려는 초청 목사를 잽싸게 쫓아갔다. 하지만 이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남편을 위해 별도로 안수기도를 부탁드렸는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거절을 당한 것 같았다.
나를 힘겹게 부축하며 주차장으로 다시 나오는 아내에게서 오랜만에 눈물을 보았다.
"괜찮아, 난 괜찮아"
사실 괜찮지 않은 건 아내인데 바보같이 위로랍시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젠 허리까지 점점 안 좋아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갈수록 그녀에게 짐이 되는 같아 서글퍼지는데 대형 교회 주차장은 왜 또 그리도 넓은지.... 아내를 볼 면목이 더 없어지던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날 안수기도를 받기는 받았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본 아내의 지인들이 교회 담당목사님에게 졸라 숙소로 돌아가려는 초청 목사님을 마지막 순간에 잠시 붙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미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목사님에게 아주 짧게나마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내 믿음이 부족해서 인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도 이미 예상했는지 낙심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다시 씩씩하게 자신의 하던 일을 열심히 해나가기 시작했다.
아내는 사실 내 병과의 싸움이 금세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미 장기전에 대비해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이행해 가고 있는 중이다.
아내는 공장일을 하면서도 밤을 새워가며 지난 2년간 공부에 매진해 얼마 전 간호학교를 졸업했고 국가고시에도 한 번에 합격해 이젠 병원에서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보수를 받으면 전문 의료인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더 높은 학위를 따기 위해 집에 오면 간호복을 벗기가 무섭게 다시 온라인 강의를 듣는다.
갑자기 가장이 되어버린 아내는 경제적인 면과 나의 길어질 병간호를 위해 평생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 커리어를 중년이 넘은 나이에 과감히 선택했다. 미국에서는 높은 연봉도 연봉이지만 전문 간호사들의 수요가 많이 부족해 본인이 건강만 허락하면 팔십 살까지도 병원에서 근무가 가능하다는 점도 그녀의 결정에 큰 이유가 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 배우가 아들을 바라보면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아내뿐만 아니라 아들 녀석들도 나의 길어질 투병 생활을 대비해 그 영화에서 처럼 모두 다 이미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큰 아들놈은 내가 공안에 잡혀 갔을 때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옥바라지를 해야 하는 엄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이 터지자 바로 휴학을 하고 미국시민권자임에도 한국 군대에 자진 입대했다. 신병 훈련소부터 고아처럼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는 그런 외로운 군생활을 홀로 이겨 냈을 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데 녀석은 또 군대를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고 미국대학으로 편입한 녀석은 학교 ROTC에 입대해 졸업과 동시에 미군 장교로 복무하기로 이미 결정했다.
"전 아무래도 군 체질인가 봐요"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늦잠 자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녀석이 다시 군대로 향하는 이유는 미군의 커진 입대 보너스도 보너스지만 집안에 부담을 주지 않고 바로 안정적인 직업을 잡아 엄마의 짐을 덜어 주려는 장남의 마음인 것 같다.
형을 따라 공대에 진학하려던 막내 놈은 나 때문인지 아니면 엄마의 영향 탓인지 하여간 마음을 바꿔 의학 쪽으로 진로를 수정 대학입시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연이은 집안의 우환으로 한창 예민할 때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공부도 곧 잘하며 무난하게 잘 자라주었다. 한밤중에도 내 기침 소리가 나면 "아빠 괜찮아?" 하며 내방 문을 빼꼼히 열어 안부를 확인하는 배려 깊은 막내가 되어 있었다.
결코 쉽진 않았지만 아무튼 우리 가족은 이제 얼추 광야를 다 지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 고난의 길을 지나오는 동안 우리 가족은 정말 많이 힘들었고 세상적으로 보면 참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담금질된 우리 가족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워졌고 그래서 더 행복하다.
아직 내 병은 치료되지 않았지만 나는 확신한다.
비록 말은 없으시지만 지옥 같은 감옥에서 그리고 깊은 죽음에서도 나를 건져주신 주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젠가 내 몸이 나아지면 나를 통한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계심을...
"감염만 없이 잘만 관리하면 낮에는 정상인처럼 활동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닥터 레디의 말이 떠오른다.
복부에서 기다랗게 연결되어 나온 도관을 꼼꼼히 소독하고 병원에서 보내준 복막투석기기에 조심스럽게 연결시킨다. 투석액이 배속으로 주입되면 맹꽁이처럼 배가 불러오고 그 액이 빠져나가면 다시 배가 홀쭉해지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밤새 계속되고 순간순간 아랫배에 불편한 압력이 가해져 오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하다.
내일 아침에는 다시 정상인 비슷하게라도 깨어나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남편이 될 수만 있다면 이쯤이야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