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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냥 Sep 12. 2023

엄마의 김장김치

살아가는 이야기

  아침 밥상을 치우고 인터넷으로 배추김치를 주문했다. 입맛도 들이기 나름이라고 이젠 사서 먹는 김치도 제법 먹을 만하다. 마지막으로 한 김장은 13년 전이고 그 뒤론 지금까지 사서 먹는다.

  엄마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던 13년 전 여름. 그 와중에도 집 앞 텃밭이 휑한 것을 못마땅해하셨다. 뭐라도 심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시큰둥하게 대답은 했지만, 빈 텃밭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엄마와의 마지막 장마의 계절을 보내고 빈집을 정리하며 동생들과 상의해 텃밭에 배추와 무를 심기로 했다. 이후 집을 비워둘 수 없다며 남동생이 고향으로 내려갔다. 동생도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분주했고, 다른 형제들도 각자 생활에 전념하며 겨우 배추와 무를 심은 텃밭은 풀밭이란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제대로 관리가 되질 않았다. 보다 못한 동네 어르신들이 오가며 손 닿는 대로 관리해주셨다.

  11월에 접어든 어느 날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동네 어르신들이 텃밭의 배추를 뽑았는데 그걸 어쩔 거냐 묻더란다. 김장해야지, 당연한 듯 대답했다. 날짜를 정하고 동생들을 소집했다. 우리가 내려가기로 한 금요일 저녁. 이웃 아주머니가 배추를 절이고 있다는 전화, 몇 분이 모여 무를 채 썰고 있다는 전화, 무김치는 어떻게 할 거냐는 전화 등등 전화통이 뜨끈해질 정도로 수차례 전화가 오갔다. 

  퇴근해 고향 집에 도착하니 이미 오밤중이었다. 마당 한쪽에 수북이 쌓여있는 배추 무더기와 커다란 갈색 고무통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허연 무 탑들. 주방엔 배추김치 소가 가득 든 함지박과 온갖 김치 재료들이 한쪽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방금까지 엄마 친구분들이 모여 양념을 버무리고 돌아가셨다는 남동생의 퉁명스러운 말에 원망의 소리도 섞여 있었다. 엄마의 부재. 엄마의 잔재. 남겨진 것들.

  새벽보다 좀 더 이른 시간, 엄마 친구 대여섯 분이 다시 왁자지껄 마당으로 들어섰다. 어리바리한 모습으로 우왕좌왕하는 내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배제하지 않고 의견을 물어봐 주시는 엄마의 친구들. 또 다른 엄마들 앞에서 난 그저 엄마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장을 마칠 때쯤은 아침이 밝아 주변이 훤했다. 뒷마무리가 되어갈 즈음 배추로 된장국을 끓여 조촐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엄마가 계셨으면 무쇠솥에 돼지고기 푹푹 삶고 막걸리 내어놓으며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을 텐데. 국을 뜨는 숟가락들의 달그락 소리와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조용조용 이어졌던 그 아침을 마지막으로 우린 텃밭을 엎기로 했다.

  그 뒤로 동네 어르신들은 여전히 집 앞을 오가며 빈 밭을 보며 뭐라도 심으라고 하지만 남동생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몇 해를 그냥 묵히더니 그곳에 관리하기 편한 잔디 씨를 뿌렸단다. 섭섭했지만 도움을 줄 수 없는 내 처지를 알기에 항변하지도 못하고 입을 닫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집에 있던 김치냉장고를 없앴다. 그리곤 필요할 때마다 김치를 조금씩 사서 먹는다. 엄마 손맛 김치가 간절히 그리운 날엔 김치를 담글까 고민도 잠깐 했지만, 다음으로 미룬 햇수만 벌써 몇 년째다.

  내년엔 꼭 해야지. 엄마처럼 밤새 배추 절이고 젓갈 듬뿍 넣어 감칠맛 나는 배추김치 소도 만들어 쓱쓱 비벼 햇김치 냄새 폴폴 풍겨봐야지. 인심 넘쳤던 엄마처럼 주변에 돌리진 못하더라도 내 식구들 입에 내 손맛 표 맛난 김치 먹여야지. 혼자 다짐해 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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