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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냥 Nov 07. 2023

전화기는 무한 사랑이에요

장애인 가족 이야기

  아침 8시 30분, 스물여덟 살 작은애는 복지관에 가기 위해 전화기부터 챙겨 든다. 그리고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게 네 번 전화를 건다. 버스를 탔네, 내렸네, 다시 탔네, 도착했네. 작은애의 이동 동선을 파악할 수 있는 통화 몇 번으로 난 안심된다. 이처럼 유용한 물건이 어딨겠나 싶을 만큼 전화기는 우리 집의 평화 유지에 있어 무용에서 유용까지 건너온 사연은 무수하다.

  코로나 시기 작은애와 함께 잡화점에 갈 일이 있었다. 오랜만의 쇼핑이라 구매할 물품을 고르다 보니 작은애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며 찾던 중 완구 진열 쪽에서 툭 튀어나오는 표정에 신바람이 들어있다. 맘에 드는 걸 발견했던가 보다. 사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오라니까 왔던 방향으로 후다닥 돌아가더니 기다려도 나오질 않았다. 뒤따라 가보니 장난감 전화기 앞에서 뽀로로 캐릭터랑 하츄핑 캐릭터 중 어느 걸 고를까 고민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어릴 적 꼬꼬마 시절로 돌아가 있는 모습이었다.

  작은애는 소머즈 귀라고 할 만큼 청력이 발달했다. 소리에 민감해 개미 지나가는 소리까지 감지하는 거 아니냐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청소기 소리 같은 일상의 소음부터 시작해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적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군가의 고음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소리였는지 길을 가다가도 귀를 틀어막고 망부석이 되곤 했다. 치료를 통해 소음의 불안에서 벗어나며 점차 소리에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장난감에서 들려오는 멜로디는 탐닉 수준까지 올라섰다.

  작은애의 치료를 다니며 들소처럼 뛰는 아이를 잠재울 방법은 손에 들려주는 작은 장난감 전화기가 최고였다. 반짝이는 불빛과 버튼을 누를 때마다 흘러나오는 기계음의 동요는 아이의 날뜀을 잠재울 특효약에 가까웠다. 그렇게 수시로 사들인 장난감 전화기는 며칠 못 가 해체되거나 변기 속으로 수장되곤 했다.

  장난감이 해체되고 망가지는 거야 다반사지만 변기 속에 수장당한다는 건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 가족은 아이가 핸드폰을 갖고 놀 때면 늘 아이의 동선을 살피며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건은 늘 순식간에 일어났다. 거의 눈 깜짝할 사이다. 화장실 쪽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안돼 외치며 쫓아 들어가 보지만 사건 종료다. 아이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고 우린 패자의 울상을 짓는 것으로 게임 아웃!

  아이가 장난감 전화기를 변기에 집어넣는 이유는 바로 소리 때문이었다. 물속에서 전지가 방전되며 나오는 특이한 음을 아이가 감지한 거다. 괴이한 소리를 들으며 변기 앞에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러다 우리의 출현을 목격하는 순간 변기 물을 내려보내며 물속으로 사라지는 전화기를 신세계를 경험하는 듯한 표정으로 들여다봤다. 그 후로도 그런 호기심은 몇 년간 채워지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다.

  안 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여러 방법을 써보았으나 허사였다. 혼내기도 하고 전화기를 숨겨놓았다가 밖에서만 주기도 했다. 하물며 변기 뚜껑을 열지 못하게 잠가놓기도 했으나 다 소용없었다. 우린 숱하게 변기를 뜯어 전화기를 꺼내고 다시 설치하는 일에 힘쓸 뿐이었다. 아이의 변기 물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할 무렵엔 일주일에 두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됐고 우리 가족은 여러 면에서 진화됐다.

  실제 전화기의 참맛을 알게 된 아이는 더 적극적으로 되었다. 거실에 있는 전화기는 거의 장난감이라 여겨 아무 버튼이나 눌러 들려오는 소리를 즐겼다. 오죽하면 냉장고 위에 올려놓고 통화할 때만 내렸겠나. 그러나 작은애는 개의치 않았다. 의자를 끌어와 올라서서 냉장고에 매달린 채 전화기를 꺼내는 도통 아이라 볼 수 없는 치밀함에 우린 그저 놀라 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장난감 전화기를 손에 들려주어야만 우리의 일상이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다만 명심해야 할 지침은 화장실 문을 걸어 잠글 것.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각고의 노력 끝에 한글을 깨우쳤다. 읽고 쓰기가 가능해질 때쯤 어느 날 역시나 특유의 킥킥거림으로 내게 다가와 종이를 내밀며 내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뭔가 싶어 들여다보니 내게 쓴 첫 편지였다. 감동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으나 감동의 눈물보다 웃음이 먼저 터져버렸다. 첫 편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엄마 전화기 사주세요’

  난 그 편지를 표구해서 벽에 걸어놓고 싶었으나 그냥 액자에 담아 한동안 들여다보며 낄낄댔었다. ‘엄마 사랑해요’가 아니라 전화기를 사달라니. 얼마나 간절하고 담백한 이중적 사랑 고백인가 말이다.

   지금도 잠잘 시간이면 작년에 샀던 장난감 전화기를 잠깐씩 만지작대다가 머리맡에 놔두고 스마트폰은 가슴에 품은 채 잠든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의 한결같은 사랑. 다섯 살의 영혼과 스물여덟의 신체가 공존하는 작은애의 전화기 사랑은 여전히 뜨겁고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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