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냥 Nov 26. 2023

덩그러니 앉아서

시 쓰는 이야기

덩그러니 앉아서  / 유복녀


수염 거뭇한 정신연령 다섯 살 어른아이가

구시렁거리며 빨래를 갠다


긴 바지 서너 개

두툼한 티셔츠 몇 장

사각 모양 삼각 모양 팬티와 반팔 러닝셔츠

모양과 크기 색깔도 제각각인 양말이 수두룩


강아지처럼 털썩 퍼질러 앉아서

양손으로 긴 옷가지 부여잡고

들었다 놨다 접었다 폈다 뒤집었다 엎어가며

빨래를 갠다


긴 바지 들고 고민하다 밀어놓고

티셔츠 양 소매 끝 붙잡은 채로

반듯하게 반듯하게 주문 걸어보지만

이리저리 밀리며 늘어나는 옷 주름들


세탁기 돌려 빨래하는 시간보다

시간과 정성 곱절로 들이며

세상 고민 홀로 진 듯

풀 죽은 등덜미


빨래 개키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이 어딨느냐며 깔깔 웃다가


나 없는 세상에

저렇게 우두커니 앉아있을 것만 같아

나 또한 그 옆에 덩그러니 앉아

흩어진 옷가지만 맥없이 들여다본다

작가의 이전글 율동공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