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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냥 Dec 08. 2023

아닌 밤중에 홍당무

살아가는 이야기

  하루는 할머니가 티셔츠를 한 장 얻었다며 보여주셨다. 짙은 쑥색으로 촉감도 부드럽고 포근했다. 입어보니 내 몸에 딱 맞고 착용감도 좋았다. 어디서 산 거냐 물으니 주인집 아주머니가 줬다며 마음에 들면 입으란다. 그러잖아도 직장에 다니며 옷 차려입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때라 웬 떡이냐 싶었다. 쑥색의 티셔츠는 어디에 맞춰 입어도 제법 잘 어울렸다. 검은색 치마에 받쳐 입으면 차분한 맛이 있고 청바지에 입어도 간편하고 좋았다.


  다음날 검은색 치마에 티셔츠를 입고 재킷을 걸쳤다. 초가을이라 티 위에 가벼운 재킷 하나 입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한낮 사무실 기온은 재킷을 입고 있기에 조금 더웠다. 재킷을 벗고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스치는 시선이 아닌 꽂힌 시선이었다. 고개를 드니 맞은 편의 사무장님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마주 바라보니 알 듯 모를 듯 묘한 웃음을 날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뒤로도 종종 시선이 느껴져 기분이 나빴지만, 왜 웃느냐 따지기도 뭣해 무시하고 넘겼다. 나만 보면 실실 웃던 이유를 며칠 뒤에야 알았다.


  남자친구와 만나기로 한 토요일. 한껏 멋 부릴 욕심에 그 티셔츠를 선택했다. 쑥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점퍼를 걸친 뒤 스카프를 목에 두르니 제법 가을 분위기가 났다.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인 잠실역으로 갔다. 영화를 본 뒤 잠실 주변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하며 데이트를 즐기다 보니 어느덧 늦은 시간. 집까지 바래다준 남자친구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난 점퍼를 벗고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었다. 곁에 앉아 과일을 먹던 남자친구가 슬그머니 내 팔뚝을 툭 치며 입을 실룩거렸다. 쳐다보자 귓속말로 티셔츠 어디서 났느냐고 묻는다. 별 시답잖은 소리다 싶어 건성으로 되물었다. 잠시 과일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이내 으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나와 할머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돌발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황한 내 표정과 티셔츠를 번갈아 보며 웃는 모습에 살짝 짜증이 났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재차 묻는 내게 놀라지 말라며 선수를 친 뒤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 티셔츠는 군인 내의란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하얗게 질린 나를 보더니 달래주듯 말을 이었다. 점퍼 속에 가려져 있어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렇더란다. 그러니 다음부턴 내복처럼 입으란다. 놀라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이 사태가 다 당신 탓이라는 듯 무안해하셨고, 나는 나대로 그동안 내가 저 옷을 입고 어디를 얼마나 쏘다녔을까 싶어 사색이 되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남자친구에게 얼른 집에 가라고 닦달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민망함에 홍당무로 변한 내 모습을 더는 보이기 싫었다. 할머니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어쩌느냐며 내 눈치를 살폈다.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 내 모습을 알아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부터 시작해 며칠간의 내 동선을 떠올렸다. 그동안 나와 스쳐 지나던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렸을까 싶어 땅 밑으로 꺼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직원들은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했을까. 친구들은 또 어떻고. 그들은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야 망신살이 제대로 뻗치고 있는 나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모르는 척 지나진 않았을 테니. 


  그나저나 군대 내의를 알아본 직장 상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용기는 더욱더 없었다. 죽을 맛이었다.

  다음날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핵폭탄 하나를 터트리고 가버렸으니 가서도 내심 걱정이 되었나 보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시간 간격을 두고 계속 벨이 울렸다. 마지못해 받으니 웃음부터 터트린다. 지금 약 올리는 것이냐며 벌컥 화를 냈더니 미안하단다. 됐으니 그만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애꿎은 화살은 과녁을 빗겨 엉뚱한 곳에 꽂히고 말았다. 웃은 죄로 모든 죄를 뒤집어쓴 남자친구는 한동안 내 무너진 자존심 세워주느라 적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뒤로 어찌어찌 얄궂었던 그 군인 내복 사건은 잊혔다. 물론 직장 상사에겐 모른 척하며 평소처럼 지냈다. 별 희한한 꼴 다 보았다며 뒤로 흉보고 다녔다 해도, 내 앞에선 내색을 안 했으니 그것만으로 그를 용서했다.    지금도 가끔 남편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말한다. 군대 내의 입고 도도하게 앉아 있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라 실실 웃음이 나왔노라고. 그래서 나와 결혼하기로 맘먹었단다. 이렇게 순수하고 순진한 여자가 다 있나 싶었다나. 그땐 그 사건이 나에겐 너무도 치욕스럽고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실수였지만, 남편에겐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때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180도 달라졌을까, 새삼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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