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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냥 Jan 05. 2024

보름달 카스테라

살아가는 이야기

  추위가 막 시작되던 초겨울이었다. 외양간의 소가 훅하고 콧바람을 내쉴 때마다 반들거리는 콧등 위로 하얗게 콧김이 서리곤 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굴뚝으로 연회색 연기가 몽실몽실 솟아오르고, 밥 짓는 냄새가 골목으로 퍼진다. 배고픈 줄 모르고 뛰어놀던 아이들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골목은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종일토록 온 동네 골목을 누볐던 나는 노곤해진 몸으로 할아버지 곁에 누워 살포시 잠이 들던 참이었다. 이른 저녁 식사 설거지와 부엌 뒷정리를 하던 할머니가 불이야 불이야 외치며 다급하게 할아버지를 불렀다.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격자문을 열어젖히며 마루를 지나 쏜살같이 할머니 있는 쪽으로 달려 나갔다. 잠결에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뒤쫓아 나간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선 채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할머니는 우물에서 양동이에 물을 가득 퍼 담아 들고 뛰며 연신 불이야 소리를 질렀다. 얼른 뒤따라 가 보니 볏짚을 쌓아놓은 외양간 한쪽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허겁지겁 물을 길어 나르고, 앞뒷집 사람들도 함께 물을 떠다 벌겋게 솟아오르는 불 위에 뿌려댔다. 외양간 안에 있던 소도 둥그런 눈을 더 휘둥그레 치뜨고 쉭쉭 소리를 내며 연신 고개를 휘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히 불길이 잡혔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불났던 자리를 보니 한쪽이 거의 다 타서 흉물스럽게 변해있었다.

  불이 다 꺼진 것을 확인한 뒤 할머니는 한달음에 옆집으로 달려갔다. 당장에라도 방문을 열 기세로 옆집 언니 이름을 부르며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런 기척이 없자 할머니는 네가 우리 집에 불을 내는 거 다 봤으니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다. 굳게 닫혔던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아저씨와 아줌마가 튀어나오며 어디서 생사람 잡느냐고 맞받아쳤다. 개숫물 버리러 나갈 때 외양간 쪽에서 후다닥 뛰어가는 게 이 집 딸이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에 곧바로 언니가 튀어나오며 그 사람이 나라는 증거가 있느냐고 따졌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옆집 가족이 한데 뒤엉켜 고성이 오갈 무렵, 동네 사람들이 점차 몰려들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수군덕대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란스러움이 지나도록 분이 안 풀린 할머니는 경찰서에 신고했다. 얼마 후 경찰관 두 명이 도착했다. 그중 한 명은 불이 난 곳을 찬찬히 살피며 할머니와 한참을 얘기를 나누었다. 다른 한 명은 불난 자리에 떨어져 있는 성냥개비와 반쯤 타다 남은 성냥개비를 주워 물증을 확보한 뒤, 주변에 찍힌 발자국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두 경찰관은 몇 번씩 옆집을 오가며 현장 검증을 끝내고, 내일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다음날 점심 무렵 어제 왔던 경찰관이 다시 왔다. 오자마자 옆집 언니를 불러 한참 이야기하더니 그중 한 명이 안방으로 들어와 엎드린 채 서류를 작성했다. 잠시 뒤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부스럭거리며 입으로 가져갔다. 제복 입은 경찰관이 우리 집 안방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여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 앵글 잡듯이 지켜보던 나는, 경찰관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그 무엇이 못내 궁금해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것은 바로 보름달 카스테라였다.

  경찰관은 동그랗고 노르스름한 빵 안에 새하얀 크림이 가득 들어있는 카스테라를 손에 들고 커다랗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난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한가득 고였다. 코앞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시선을 모른 척하기엔 부담스러웠는지 경찰관은 빵 한 쪽을 떼어주며 먹으라 했다. 난 그 빵을 받아들고 얼른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는 내 손에 들린 빵을 보더니 있는 힘껏 꿀밤을 주었다. 그리곤 경찰관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굽실거렸다. 난 쥐어박힌 꿀밤 자리가 너무 아파 눈물을 찔끔 짜내면서도 손에 들린 빵 한 조각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맛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부드럽고 달콤한 꿀맛이었다.

  그때 범인으로 지목됐던 그 언니는 나중에 자신이 그랬노라 자백을 했단다.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어른들의 이야기라 자세히 모르지만, 그 무렵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옆집 사람들과 자주 말다툼이 일어나곤 했었다. 그게 이유였지 싶다. 그 언니는 그 뒤로도 경찰서에 여러 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고 구치소까지 갔으나, 옆집 아저씨의 간곡한 청으로 합의를 보고 풀려나왔다. 그 후 옆집은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슬그머니 이사 갔다.


  얼마 전 집 근처 슈퍼마켓에 갔다가 빵 진열대에서 보름달을 발견했다.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아직도 그 빵이 생산되니 나로선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다. 반가운 마음에 덥석 들어 계산대에 올렸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빵을 한 입 베어 물자 잊혔던 추억이 입 안 가득 달콤함으로 채워졌다. 베어 문 자리를 들여다보자니 그날 그 경찰관의 멋쩍어하는 표정과 할머니의 매서운 꿀밤 한 대가 선연히 떠오른다. 그때 그 경찰관 아저씨는 지금도 카스테라를 좋아할까. 늦은 점심 대신으로 먹던 빵 한 조각을 빼꼼히 들여다보던 코흘리개 꼬맹이를 기억이나 할까. 허튼 상상 너머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들은 가끔은 고단한 하루에 달콤한 특효약이 될 때가 있다. 보름달 카스텔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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