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앞 복도에 놓은 화분에서 나팔꽃이 몇 송이 피어 있다. 피었다가 지기까지의 시간이 가장 짧은 꽃이다. 어느 유행가의 노랫말처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 되기도 전에 지고 만다. 유행가에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을 짧은 사랑에 빗대어 노래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 더 짧게 피었다 진다. 아침에 피었다가 해가 뜨면 시들거리고 해가 중천을 지나갈 즈음엔 꽃잎술을 틀니 뺀 할머니 입술처럼 한껏 오므린다. 그리고 해질 무렵이며 속절없이 꽃잎을 떨군다. 툭. 불 같이 사랑하고 미련 없이 헤어지는 연인들의 이별처럼.
올봄에 화분에 목화 씨앗을 심었었다. 작년부터 벼르던 일이었다. 인터넷에서 씨앗을 주문해 겨우내 보관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만치 않았다. 겨우 새순이 올라오는가 싶더니 어제까진 싱싱하던 것이 다음 날이 되면 시들대다가 그 다음날이 되면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풀썩 고개를 떨궜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인터넷을 다시 뒤져 아예 모종을 주문했고 겨우 떡잎 달린 모종을 다섯 대 받았다. 정성을 다했지만 내 정성이 마뜩지 않았던지 그것들도 슬금슬금 죽고 말았다. 올해 기대했던 목화 농사는 여름이 오기도 전에 망쳤다.
봄이 다 가도록 팽팽이 놀리던 빈 화분에서 어느 날 삐쭉 고개 올린 새순 하나. 언뜻 봐도 나팔꽃 새순이었다. 작년에 피었던 자리에서 씨앗 하나가 떨어졌던가 보다. 대를 이은 나팔꽃대는 사람도 못살겠다는 이 이상기온 속에서 꿋꿋하게 줄기를 뻗어올리기 시작했다. 알아서 잘 커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도 정말 저 혼자 알아서 잘 컸다. 지지대를 세워주고 줄기 끝을 걸어주었더니 또 그 길이 자신의 살 길인줄 어찌 알고 지지대를 칭칭 감으며 하늘 향해 쭉쭉 솟아올랐다. 돌봄을 받지 못해도 스스로 다져지는 생명력이라니.
나팔꽃을 키우기 시작한 건 코로나가 시작되던 해부터다. 모두가 집 안에 갇혀 지내던 시기였기에 문밖으로 나가봐야 갈 곳이라곤 공원 밖에 없었다. 주말에 공원으로 산책 가던 중 길가 시멘트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나팔꽃 마른 줄기엔 나팔꽃 씨방이 달려 있었다. 여름내 고생해서 씨앗을 품었을 텐데 저리 속절없을까 싶은 마음에 씨앗 몇 알 주머니에 챙겨왔다. 그리곤 빈 화분에 툭 던져놓았다.
이듬해 봄 빈 화분에서 초록빛 순이 올라왔다. 처음엔 뭔가 싶었다. 기억에서 까마득히 잊혀졌던 씨앗이었는데 내게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줄기를 올리고 잎새를 돋우더니 꽃을 피워냈다. 아침에 피었다가 오후에 지고나면 씨방만 남아 씨앗을 품고 초가을까지 버티는 나팔꽃. 허무한 꽃잎과는 다르게 씨앗을 잉태하는 시간은 길었다. 어린 새색시처럼 살포시 들어앉은 씨방 안의 씨앗들은 모래알처럼 여물어갔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던 날 어딘가로 툭 자신을 털어냈다. 그렇게 몇 년 우리집에서 생을 이어갔다.
아침에 물을 한 바가지 부어주다 보니 도톰해진 화관이 몇 개 눈에 띈다. 어쩌면 내일 아침엔 새로운 꽃이 화들짝 피어날런지 모르겠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마는 꽃이지만, 그래서 인간의 미련한 사랑에 빗대어져 억울하기 짝이 없겠지만, 투쟁에 가까운 생명력은 철없는 인간의 사랑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숭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