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이야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는 동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어 긴장되었다. 사전 정보 없이 본문부터 읽은 탓일까. 겉표지부터 다시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작가의 약력, 추천사, 옮긴이의 글, 그리고 막달레나 세탁소 정보까지. 그리고 본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처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섞였다. 서민들의 애환이 아닌, 사소한 것들로 치부되는 인간의 본성과 잔혹함을 들여다보는 일.
이 책의 소재인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했던 시설로, 당시 ‘성 윤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여성들을 교화시키고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곳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죄 없는 소녀들과 여자들이 그곳에 감금된 채 폭행과 성폭력, 정서적 학대 속에서 노역에 시달렸고 그들의 아기들 또한 방치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무려 70여 년간 자행되어온 잔혹한 인권 유린에 대해 아일랜드 정부는 아무런 사죄의 뜻도 표명하지 않다가 2013년이 되어서야 뒤늦은 사과문을 발표했다. (다산북스 출판사 서평 글 인용)
이야기의 주체인 펄롱은 중년의 가장으로 석탄과 장작 등 땔감을 공급하는 일을 한다. 그의 가족은 알뜰살뜰한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이 유일하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는 미혼모로 그가 열두 살에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그 시절 미혼모는 시설에 들어가야 했지만, 미시즈 윌슨이 돌봐주어 계속 그 집에서 살 수 있었다. 아버지는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뒤에서 묵묵히 어머니와 자신을 챙겨주던 네오가 후일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할 뿐이었다.
그는 성실했다. 과거의 아픔 속에 머물지 않기로 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가정이 잘 유지되고 아이들이 어엿한 숙녀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일에만 신경 썼다. 직원을 둘 수 없어 큰딸을 사무실에 두고 일 처리를 시키면서도 그는 늘 불안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자신에게 다짐하듯 아내에게 묻는다. 아무튼 우린 괜찮지?
살면서 가끔 밀려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다짐했다.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렇게 그는 마음을 정리하며 다시 성실한 가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마음을 통째로 흔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의 삶은 그렇게 지속되었다. 그해 12월, 언덕 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수녀원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그는 예전 열여섯 나이로 자신을 임신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한다. 미시즈 윌슨이 거두지 않았다면 같은 처지였을 고만한 또래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내면은 요동쳤다. 제발 도와달라는 그 아이들의 간절함을 외면한 후 길을 잃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의 갈등을 만류하는 아내, 수녀원과 척지지 말라며 그게 아내와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며 조언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는 결심한다. 예전의 미시즈 윌슨이 어머니에게 베풀었던 온정처럼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그리고 자신이 낳은 아이를 찾겠다는, 젖이 흘러 앞섶이 흥건해진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이처럼 소설은 실제 사건을 중요 모티브로 다뤘으며 허구적 인물을 통해 국가와 사회가 저지른 횡포를 드러낸다. 또한 그와 같은 부당한 일이 일어남을 인지했거나 자각하면서도 외면하는 사람들과 부당함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모순을 낱낱이 파헤친다. 아니다. 작가는 정작 말하고 싶은 내용은 숨긴 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이 글을 읽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저자는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그리고 메리 매케이 선생님에게.’라고 썼다. 어쩌면 그들을 향한 위로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무지해서 몰랐거나 양심을 팔았거나 자신의 안일을 위해 불합리를 외면했던 사람들을 향한 일침일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경기도여자기술학원 사건’도 그렇고 ‘형제복지원 사건’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했던, 혹은 외면했던 우리 주변의 숱한 불행한 사람들을 내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를 대며 우린 지나쳐왔다. 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관심과 친절이었음을 알면서도 지레 외면해버리는 잔인함을 마음 깊이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소시민인 펄롱이 애써 이룬 가정의 행복이 무너지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그의 아내가 했던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는 말에 더 공감하기도 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내 막연한 불안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깨달았다. 속세와 척지지 않기 위해 나의 일신만 챙겼던 비양심을 자각한 거다.
소시민의 삶은 펄롱의 아내처럼 자신의 안위가 우선일 수밖에 없다. 멀리 내다보며 남을 헤아릴 여유는 사치다. 남의 불행 앞에서 알아도 모르는 척 외면해야만 나와 가족이 안전하다면 기꺼이 비양심을 택하게 된다.
독자는 펄롱의 내면의 갈등을 지켜보며 함께 불안감을 느낀다. 이후 그가 결심을 굳힌 듯 그 소녀를 데리고 나와 자신의 집으로 걸어갈 때 온전히 그를 지지하는 마음이 된다. 그렇지. 그의 말처럼 서로 도우며 살아야지.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각자도생이 아닌 함께 나아가는 삶이 인간이 갖는 선한 본질이다. 펄롱이 고민 끝에 택한 삶의 진실 앞에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오히려 뜨끈한 위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