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그림찾기’를 시작한다. 내 집중력이 총동원되고 그 순간 세상사는 잠시 뒷전으로 밀린다. 어디 어디 숨었나. 기어코 찾아내 동그라미를 쳐야 속이 후련하다. 어디 보자.
어린 시절부터 무언가 숨겨진 걸 찾아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할머니가 우리 몰래 숨겨놓은 주전부리가 담긴 소쿠리를 찾아내고, 소풍날 보물찾기 놀이가 그랬고 친구들과 내기처럼 시작하는 숨은그림찾기가 그랬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종이 위에 펼쳐진 그림을 친구와 머리 맞대고 누가 먼저 찾아 동그라미를 치는가에 자존심까지 걸었던 때도 있었다.
최명숙 작가의 신간을 배송받았다. 『숨은그림찾기』란 제목의 첫 소설집이다. 제목부터 흥미롭다. 숨어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기라니.
표지가 예사롭지 않다. 어둑한 숲 속에 호롱불을 들고 외딴곳으로 들어선 소녀. 얼핏 보면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찾아보세요. 이제부터 숨은그림찾기는 시작된다. 잊고 있던 전의가 솟아오르며 흥미진진하다. 어디 한번 시작해 볼까.
그림판으로 들어서기 전 작가는 말한다. 고개를 내밀 듯하다 숨어버리는 내면의 나를 만나기 위해, 그 발화하지 못한 채 가두었던 이야기를 묶어 내놓았다고. 오랜 시간 웅크리고 침묵했던 사유들,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그 이야기를 밖으로 내놓으며 비로소 자신이 추구하던 것에 실체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어렴풋한 안갯속 같던 내면의 이야기들이 제 빛깔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니. 이보다 더 흥미로울 수는 없다.
첫 번째 작품은 표제이기도 한 「숨은 그림 찾기」와 첫 대면을 했다. 내가 너무 만만하게 여겼나. 도대체 알 수 없는, 연결점을 찾을 수 없어 문장과 문장을 헤집고 다니며 내가 놓친 부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난해한가. 무엇을 어디에 숨겨놓았단 말인가. 미로를 헤매다 끝내 미로 안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첫판부터 실패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지.
다음 작품에 도전했다. 두 번째 작품은 「달빛」. 작품 속 화자는 자신이 속았다는 말부터 시작한다. 그 문장에 속을 내가 아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 내려간다. 할머니와 작은엄마의 지난한 삶이 펼쳐진다.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역시나 홀로 된 엄마와 나, 그리고 삼촌. 어느 날 길손처럼 찾아든 곱디고운 여인. 그렇게 가족을 이룬다. 그러나 삼촌의 죽음으로 가족은 해체된다. 가족으로 남으려는 작은엄마를 기어이 내보내는 할머니와 어른들의 힘듦을 작품 속 나는 안타깝게 지켜본다. 훗날 작은엄마와 해후하기 위해 간 곳에서 뜻밖의 인물과 맞닥뜨린, 작은엄마의 긴긴 아픔들. 난 이 작품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나. 연민일까. 먹먹한 통증이 인다.
세 번째 작품 「아주 진부한 것들의 목록」, 네 번째 작품「열쇠」, 다섯 번째 작품「유를 찾아서」의 숨은 그림 조각은 ‘인연’이다. 각각의 인연들이 내게 닿았다가 멀어진다. ‘아주 진부한 것들의 목록’에선 내가 좋아했던 여인은 이유도 알리지 않은 채 나를 떠나고 먼 후일 그녀의 동생을 통해 소식을 알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동생과 이어진 인연은 진정한 사랑이 움튼다. ‘열쇠’는 그녀와 정우가 등장한다. 진중한 사랑을 갈망하던 나와 사랑을 가볍게 생각하는 그를 떠나며 받았던 상처는 모든 다가오는 인연들에 거부감으로 표출된다. 사람에 치이고 생활에 지친 나는 작은 방안에 두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열쇠로 잠근다. 우연히 만난 정우는 내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지만 지난날의 상처로 인해 그를 밀어낸다. 그러나 새로운 인연을 맞아들이는 그녀의 사랑 방식을 통해 어쩌면 굳게 닫힌 마음의 열쇠를 풀어줄 수도 있을 정우를 기다린다. ‘유를 찾아서’ 또한 가슴속 깊이 묻어둔 옛사랑을 길어 올리는 이야기다. 가정교사로 들어간 집에서 눈동자에 푸른빛이 도는 그녀 ‘유’를 만났다. 불현듯이 찾아온 유와 여행을 떠났고 하룻밤을 보낸다. 이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유. 그날 밤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한없이 울던 유에게 이유를 묻지 않은 걸 두고두고 후회한다. 그녀와 눈동자 빛깔이 닮은 윤대표가 나타나기 전까지. 윤대표는 과연 유의 딸일까. 읽는 내내 시선을 돌릴 수 없었던, 가독성 있는 작품이었다. 어찌 되었을까. 지레짐작하지만 결코 작가는 답을 알려주는 법이 없다.
여섯 번째 이야기인 「두 여자 이야기」, 일곱 번째 이야기인「두 남자 이야기」는 세트 같지만 세트가 아니다. 각각의 사연이 있는 두 여자와 두 남자의 삶을 다룬 이야기다. 먼저 두 여자는 액자소설로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웃음이 헤픈 여자’와 ‘뻐드렁니를 가진 여자’. 엄마라는 자리는 어떤 걸까. 무조건 헌신해야만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일까, 아니면 자신의 행복을 우선시해도 괜찮은 자리일까. 늘 두 가지 고민 앞에서 갈등하지만 끝내 나를 희생해 가족을 살리는 역할, 엄마라는 자리. 작품 속 두 여자의 삶은 가족을 선택하나 그 끝은 여지없이 아픔이다. 그렇다면……. 두 남자는 삼촌과 조카 이야기다. 성실한 조카가 챙겨줘야만 하는 불성실한 삼촌. 아등바등 성실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 조카에겐 늘 걸림돌처럼 앞에 놓인 삼촌이 있다. 어찌할 것인가, 운명처럼 지고 가야 하나. 아니면 거추장스럽기만 한 혹을 떼어내듯 외면해야 하나. 문장 안에 답이 있다. 약간의 문해력을 보태 찾아보길.
여덟 번째 작품인 「합장」과 마지막 작품인 「파리가 쏘아 올린 사랑방정식」은 노년의 삶이 들어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작은할머니. 할아버지가 후처로 들인 작은할머니로 인해 할머니는 평생 가슴을 치며 살았다. 죽음이 임박하자 할아버지와 합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은근히 내비친다. 그러나 작은할머니가 낳은 자식은 합장을 반대한다. 할머니의 맘고생을 보며 자란 딸인 고모가 받아친다. “살아생전 영감 한 번 제대로 차지 못 한 양반 생각도 해줘야지. 그럼 니 엄마하고 합장해야 된다는 거니?” 속 끓이며 사는 엄마를 지켜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기에 그 말이 불처럼 튀어나왔을까. 부부로 산다는 게 뭘까. 사랑일까, 신뢰일까, 아니면 그 어떤 이유로 불의조차 견뎌내며 인연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걸까. 바람기 많은 남편과 이별을 생각하던 화자는 할머니가 살아냈던 삶을 보며 차갑게 식어가는 잿더미에서 마지막 불씨를 찾아냈는지도 모르겠다.
‘파리가 쏘아 올린 사랑방정식’은 마지막 퍼즐처럼 남겨두고 싶다. 박완서 작가의 필력과 견줄 만한 이야기라는 정도의 힌트로 갈무리한다. 사랑방정식! 인생을 절반 가까이 살아내며 닿았다가 흩어졌을 인연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쥐고 있는, 그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첫 번째 작품 ‘숨은그림찾기’와는 다르게 뒤의 작품은 술술 읽혔다.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 할머니와 어머니, 삼촌, 고향, 내면의 아릿한 감정들은 작가가 먼저 출간했던 두 권의 산문집에서도 만날 수 있다. 작가를 성장시켰고 문학으로 발돋움하게 한 원동력이다. 그 원동력이 작품 안에서 디딤돌이 되기도 하고 주춧돌이 되어 이야기들을 떠받들고 있다. 작가는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고 이야기를 만든다. 만나고 헤어지기도 하고, 따뜻하거나 시리거나, 아프거나, 치유되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내고 내면을 채워나간다. 달리 말하면 ‘숨은그림찾기’를 통해 독자에게 혼란에 빠트리고 이어 정성껏 닦아내고 살아내는 인물들을 내세워 통찰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보면 작가는 영리하고 주도면밀하다. 숨은 그림 찾으려니 어지럽지?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 얘기를 들어 봐. 딱 이런 느낌. 독자를 책 속에 붙들어 놓고 삶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 수도 있어. 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지. 속단하고 결정짓기보단 뭉근하게 오래 우려내며 진국을 기다려보는 건 어때?
작가가 숨겨놓은 그림들을 다 찾아내진 못했다. 그러나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기로 한다. 어쩌면 삶이란 제각각의 모양과 색채를 지녔으니 자신의 그림을 찾으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내 삶의 색채를 찾아가는 것. 내 안엔 어떤 숨은그림이 들어있을까. 들여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