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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냥 Nov 01. 2024

나무 지킴이 떨켜

글 쓰는 이야기

  어느덧 가을이네. 가을이 깊어지면 산천은 화려한 변신을 시작해. 가을바람 한 줄기에도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은행잎들은 또 어떻고. 그런 풍경은 가을이란 계절이 만들어준 우연한 선물일까? 아니래. 은행나무엔 숨겨진 비밀이 있어. 그건 바로 떨켜라는 세포층이야. 떨켜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이어지는 이음새에 자리하고 있어. 


  떨켜가 하는 일은 단순해. 나무를 지켜주는 일이지. 다시 말하면 떨켜의 역할은 나무에 있는 수분을 지켜내는 일과 미생물의 침입을 막는 일이야. 하지만 그 일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닐 거야. 

  봄이 되면 은행나무는 모든 기운을 가지 끝으로 모으고 뿌리부터 퍼 올린 수분으로 새순을 틔워. 나뭇가지는 겨우내 굳게 닫혔던 수문을 열며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뭇가지는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겠지. 봄이 다 가도록 새순을 틔우고 새잎을 키우느라 바삐 지내다 보면 지칠 때도 있을 거야. 그래도 무더운 여름날 자신이 키워낸 나뭇잎이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그 그늘에서 누군가 잠시 쉬어간다면 더없는 보람으로 여길 테지.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오면 가지 끝 떨켜의 마음은 분주해지겠지.


  오늘 아침은 제법 쌀쌀했어. 바람도 어제보다 차가웠고. 날씨를 가늠하던 떨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았을까. 슬그머니 샛눈을 떠 주변부터 살폈겠지. 그리고 초록 잎이 가득한 나무를 바라보며 안도했을 거야. 긴장했던 마음을 추스르며 자신에게 찰싹 붙어있는 나뭇잎을 있는 힘껏 잡아주었겠지. 정말 그랬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가을바람이 한 번씩 다녀갈 때마다 나뭇잎은 자꾸 힘을 잃어가고 촉촉했던 푸르름은 시들 거려. 그런 날엔 햇살 쪽으로 슬쩍 밀어주며 기운을 내라고 격려도 하지만 떨켜도 모르진 않을 거야. 나뭇잎이 왜 자꾸 흔들리는지, 왜 자꾸 잎을 내려뜨리는지 말이야.


  유난히 밤기운이 차가운 날이었어. 새벽엔 희뿌연 서리도 내렸지. 나뭇잎은 밤새 오들오들 떨며 자신을 지켜달라고 애원했겠지. 떨켜는 된서리에 누렇게 뜬 나뭇잎이 애처로워 어서 아침이 오기만 기다렸을 거야. 아침 햇살이 축 처진 나뭇잎 위로 쏟아져 내려와 부지런히 언 몸을 녹여줄 때, 그는 마지막 물 한 모금을 나뭇잎에 건네며 마음의 준비를 하겠지. 이젠 더는 어찌할 수 없기에 그 마음은 더 쓸쓸했을 테고.

  떨켜는 잠시 지난날을 떠올려. 이른 봄 야윈 가지 끝으로 어린 새잎이 돋을 때의 간지러움을. 연둣빛이 점점 짙어져 그의 나무가 온통 짙은 초록으로 가득해질 때의 그 뿌듯함을. 그리고 햇살이 멀게 느껴지면 드디어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맨 처음 나뭇잎을 떠나보낼 땐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 떨어지지 않으려는 나뭇잎이 안타까워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을 거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잎새까지 떨구고 난 뒤에는 몇 날 며칠 가슴앓이를 했을 테고. 몇 차례의 이별을 맞이했으니 이젠 좀 담담해지려나 싶겠지만, 여전히 이별은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체득했어. 그래서 더 매몰차게 나뭇잎을 밀어냈는지도 몰라. 


  세찬 바람이 다가와 나뭇가지를 흔들며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줘. 바람에 떠밀려가는 나뭇잎이 애처로워 고개를 떨구었겠지. 멀어져 가는 나뭇잎을 향해 안녕이라고 짧게 인사하며 가만히 지켜보았을 거야. 떨켜는 잠시 나뭇잎의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담담히 둥치에게 전하겠지. 이제 다 끝났어. 괜찮아. 괜찮아. 겨우내 동장군이 가지 끝에 매달려 살갗을 파고들어도 떨켜는 자신의 나무를 위해 묵묵히 견뎌내. 그는 다 알고 있었어. 이별의 고통은 자신이 지켜주는 나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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