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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말고 돼지가 되었다

슬픈 분개 25화

by 완두


오늘 연가를 냈다.

바쁘고 어수선한 연말에 연가를 낼 수 있었던 건, 총 연가일수 중 70% 이상을 사용하라는 상부의 압력 '덕분'이었다.

짱님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남들 안 쉴 때 혼자 쉬는 게 정말 좋다.

주말 이틀 동안 누워서만 지낸 것도, 내게 남겨진 또 하나의 휴일 때문이었을 거다.


혼자만 쉬는 월요일에 하고 싶은 일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겨울 햇볕 받으며 두 시간 정도 천변 걷기

돌아오는 길에 해물칼국수를 사 먹고 그 옆 카페에서 커피 마시기

동료 직장에 커피 사 들고 깜짝 방문하기

전에 타로 공부했던 샵 방문해서 신년운세 보며 수다 떨기

백화점 천천히 돌며 대폭 할인 상품 찾아내기

카페 가서 하루 종일 글쓰기 혹은 새로 공부 시작한 점성학 개론서 읽기...



하루 시작은 순조로웠다.

난 늦잠을 자는 스타일이 아니라 늘 이른 시간에 일어난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반신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며 카드로 하루 에너지를 점검하는 게 내 아침 루틴이다.


욕조에 온수를 받으며 무심코 체중계에 올라갔다.

요즘 워낙 간식을 입에 달고 산 데다 늘 누워 지내다 보니 몸이 무겁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피해 다녔던 체중계에 아무 생각 없이 발을 얹어놓은 거였다.


세상에... 내 인생 최대 몸무게가 저울에 딱 찍혔다.

막연히 살이 쪘겠거니 했는데, 저울은 명확히 숫자로 그걸 보여줬다.

보름 전쯤 목욕탕에서 위기감을 느꼈던 그 몸무게보다 무려 2.5킬로가 더 늘어난 무시무시한 숫자.


나는 어느새 돼지가 되어있었던 거다. 꿀꿀.


이유는 모르지만, 돼지 이미지는 모두 사랑스럽다. 하긴 어릴 적 집에서 돼지를 키웠다는 친구 말로는 세상 모든 짐승 중 가장 예쁜 게 새끼 돼지라고 했다.



올 초에 읽었던 책 중에 이런 게 있다.

열다섯 살 사춘기 아이들이 어느 날 동물로 변신하는 이야기.

곰, 기린, 들개, 하이에나 등으로 변해버린 아이들이 우왕좌왕하는 내용의 청소년 소설이다.


그 책을 읽으며, 내가 지금 변신한다면 과연 어떤 동물이 될지 생각해 봤다.

몸은 단연코 돼지,

가슴속은 새 혹은 밴댕이,

머리는 닭,

눈알은 동태

입은 붕어...

그걸 종합해 보니 아주 이상한 괴물이 그려져서 슬펐다.


그래서 그런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운동하고, 좋은 책도 읽고, 마음을 곱게 가꾸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다.

결국 이렇게 돼지가 돼버렸지만.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배고플 때만 먹고, 먹은 뒤 바로 눕지 않고, 틈나는 대로 걷고...

옛날 드라마 보며 시간 죽이는 대신 좋은 책 읽고...

하릴없이 휴대폰 들여다보는 대신 브런치에 글 쓰고...


다만, 이 노력은 내일부터 하려고 한다.

오늘까지만 행복한 돼지로 지내야겠다. 꿀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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