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화가 이철수(1954~)의 책을 보고 또 본다.
같은 책을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
무심히 책장을 넘겨도 책에 실린 판화나
문장 하나하나가 그냥 넘어가지 않게 만든다.
그렇다고 글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글도 그림도 아주 쉽고 간결하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작품은 선미(禪味) 가득해 고즈넉한 산중의 암자를
거니는 듯한 맛까지 느낄 수 있고, 여백 가득한 작품에서는
외려 표현의 대담함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심지어 내 재간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알듯 모를듯한 모호함도 좋다.
좌탈
염주 끈이 풀렸다
나 다녀간다 해라
먹던 차는
다 식었을 게다
새로 끓이고,
바람 부는 날 하루
그 결에 다녀가마
몸조심을 하고
기다릴 것은 없다.
* 좌탈이란 앉은 채로 돌아가신다는 뜻이다.
어떤 고승의 열반 송보다 소탈하고 담박해서 감동적이다.
마음 쏟아지는구나
새, 쏟아지는구나. 대숲으로.
다투어 돌아드는구나.
되새들 저리 까맣게 내려앉되
사람과 같지는 않아서,
두 가지 · 세 잎을 혼자 차지하는 놈은 없으리라.
대숲에, 서로 나누어 앉아
밤 동안 그저 잠자려는 것이지.
본분사라.
새 쏟아지고 나면 밤하늘에 해 떨어지리라.
밤새 어두우리라. 사람도, 잠들면 되겠다.
땅콩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이쁘기만 한데
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벼와 한논에 살게 된 것을 이유로
'잡'이라 부르기는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