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
- 유종인
노각이란 말 참 그윽하지요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
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
기러기 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銀魚)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
아무려나
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난이 울릴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붓한 집 한 채 지어 건네는 맘
사랑이 그만치는
늙어가야 한다는 말 같지요
노각이라는 말 늡늡하지 않나요
반그늘처럼 늙어 떠나며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
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다는 거
은어 향에 밴 수박 향서껀
늦여름 거쳐 가을 허공이든
그대 혀끝이나 귓볼에 스친 우박이든
저물지 않는 말간 상념의 맛집
내 욕심을 늙히어 그대에게
집 한 채 물려주고 가는 맛 같은
노각이라는 말 낙락하지요
- '노각'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듯싶다.
늙은 오이를 일컫는 말이다.
장아찌로 많이 먹는다.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좋다.
한낱 늙은 오이, 노각을 두고
"그 노년한테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이란
신선하고도 오묘한 표현을 하다니!
이어지는 구절도 감동이다.
"반그늘처럼 늙어 떠나며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
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다는 거",
"내 욕심을 늙히어".
하나하나 묘사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고즈넉하면서도 품격 있는
민속마을의 전각을 대하는 듯하다.
오이는 젊어서 생오이와 오이소박이, 오이무침, 오이냉채로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어주다가
늙어서도 우리 입을 즐겁게 해 주니
노각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노각은 늙은 오이가 아니라
'곱게 나이 드신 어르신 오이'다.
우리네 인생도 노각처럼
욕심 버리고 끝까지 베풀며
곱게 나이 들어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