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풍경은 사람이 만든다. 사람들의 삶과 흔적이 버무려져 있는 골목길은 풍경 중의 풍경이다. 굽이진 세월 따라 삶의 실체가 녹진히 녹아 있는 우리 동네 골목길 이야기다. 하늘까지 빼곡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길 건너편은 갖은 메뉴의 음식점과 여러 업종의 크고 작은 가게가 밀집해 있다. 삭막하고 무질서하기도 하지만 아기자기한 멋도 있어 가끔 산책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밤에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한잔하기도 한다.
어느 날 작정을 하고 동네 기행에 나섰다. 특별히 '기행'이라고 이름 붙이니 평소 익숙한 후미진 골목길도 달리 보였다. 타박타박 무심하게 걷더라도 낯선 풍경 앞에선 절로 걸음이 멈춰졌다. 목이 안 좋아서인지 부침이 심한 업종인지 몇몇 곳이 간판을 바꿔 달았다. 시내에서 1차 먹고 2차 입가심으로 찾기도 하는 호프집은 안주를 안 시켜도 괜찮았는데 아쉽게도 김밥집으로 바뀌었다. 권리금은커녕 손해를 감수하고 떠나지 않았을까 싶어 마음이 짠해진다. 꽃집도 하나 있었다. 봉은사 홍매가 채 피기도 전, 저 멀리 남도에서 올라온 봄과 화훼업자가 만들어낸 봄이 전시되기도 하고, 치자 꽃과 천리향이 내뿜는 고혹적인 향이 주변 식당들의 음식 냄새를 압도하고, 남천과 부겐빌레아가 화사함으로 겨울의 칙칙함을 덮어주기도 했는데 겨울나무처럼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살기 팍팍하더라도, 아니 살기가 팍팍하니 외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꽃집 하나 있으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되는 집도 많고 여전한 곳도 많다. 직장 절친이 짬뽕 하나는 최고라며 극찬한 중국집, 탁월한 가성비로 고교 동창들한테 인기가 높은 고깃집. 무턱대고 들어서면 누군가가 거나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줄 것만 같다. 내 뒤통수만 보고도 나를 알아보는 단골 이발소,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난전과 재래시장, 추위와 더위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아내의 생일날 깜짝 쇼로 이 집의 빵을 아침상에 올려 남편 점수(?)를 만회하게 해준 빵집, 아내가 식구들의 삼시 세끼를 위해 찾는 생협과 마트, 그리고 헬스, 이발소, 도서관, 한의원, 치과, 안과, 정형외과, 약국, 은행...... 생활의 결을 이루는 장소들이 촘촘히 이어져 있다. 방향을 바꾸면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호수와 돌담길, 일 년 내내 전시회가 열리는 아틀리에, 4월이면 솜사탕 같은 꽃을 피우는 마로니에(칠엽수) 가로수 길과 넓은 이파리를 떨구어내며 가을 정취를 고조시켜주는 플라타너스 길, 다시 아파트 안으로 들면 내가 '마이 리틀 포레스트'라고 이름 지은 아담한 숲까지.
이 동네로 이사 온 이후 20년간 내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 내가 도움을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다들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경기가 좋았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냐며 당당하고 씩씩하게 소임을 다하는 이웃분들. 꼽아보니 수백 명은 족히 될 듯싶다. 이분들 덕에 나도 살아가는 재미와 활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내 한 몸을 위해 이렇게 다양한 업종의 많은 가게들과 여러 장소들과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던가 새삼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나이지리아의 이 속담을 이렇게 살짝 바꿔 봤다. '나 한 사람이 잘 사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고. 감사한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더러 불친절과 야박함에 서운한 적도 있었지만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분들도 그날은 바빠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집에 사정이 있어서... 이해와 포용으로 받아들여야겠다.
떠나간 이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지금 일하시는 분들은 잘 꾸려가고 있는 걸까. 이웃분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부자 되시길! 앞으로도 오래 뵙기를 바랍니다. 두루두루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