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민복, <논 속의 산 그림자>

논물에 비친 반영이 아름답다

by 길벗


논 속의 산 그림자

- 함민복(1962~)


물 잡아 논 논배미에

산 그림자 드리워져

낮은 물 깊어지네

산 그림자 산 높이의 열 배쯤

한 십여 리

어떻게 와서

저리 몸 담그고 있는지

거꾸로 박힌 산 그림자 속

바위는 굴러떨어지지 않고

나무는 움트네

개구리 울음소리

산 그림자 깡깡하게 풀어놓던

며칠 밤 지나

흙을 향해 허리 굽히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인

농부들 푸른 모춤을 지고

산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네

뒷걸음치며 산에 모를 심네

바위 위에도 모를 꽂아 놓았네

산 그림자 속에서

백로 한 마리 날아 나와

편 목 다시 구부리며

젖지 않은 발 적시며

산 그림자 위로 내려앉네

*출처 :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


- 봄날 모내기를 막 끝낸 연초록 논은

어떤 신록보다 찬란하고

여름날 무르익기 시작하는 논은

어떤 녹음보다 짙다.


논에 백로 한 마리

무심히 외발로 서 있는 모습은

초록의 여백에 하얀 점 하나 찍듯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논에 비친 그림자도 아름답다.

물속에 비친 산은

제가 산이라 우기는 듯해

어느 쪽이 진짜 산인지

헷갈릴 정도다.


논에 물을 대는 도랑도 그렇다.

물고기들은 산과 숲 그림자

가득 담긴 물속을

유영하는 게 아니라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숲속을 거니는 것처럼 보여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다는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무논,

관심과 감성을 갖고 바라보면

그윽하면서도 아름답다.

특히 논물에 비친 것들은

또 하나의 풍경,

1+1 풍경이 된다.


봄날, 무논에서

수수하면서도 찬란한

우리 토종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SE-57e6e97e-8edc-45bf-a412-d1a0bf41aca8.jpg?type=w1 논물에 비친 숲 그림자
SE-8302169e-27eb-46c4-8f3b-a4882d5d3a6f.jpg?type=w1 철원 소이산에서 내려다 본 비무장지대의 무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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