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니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열받고 답답하고 섭섭하고 못마땅하고 슬프기까지 한 일이 많다.
내가 속 좁고 까칠해서일 것이다.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처럼
이를 서정적으로 묘사할 재간은 없지만 일상에서 떠오르는 것들,
뭉뚱그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나열해 본다.
비 그친 뒤 메마른 길 위를 죽을힘을 다해 기어가는 지렁이.
어제만 해도 벌 나비가 꿀을 다디달게 빨아먹었는데
환경미화한답시고 다음 날 뿌리째 뽑혀진 들꽃들.
수액 주사를 단 채 소음과 공해에 시달리고 있는 도심의 가로수.
스페셜이란 이름을 달고도 재방송만 거듭하는 TV 방송.
새벽에 굉음을 내며 불쾌지수 RPM을 최고조로 올리는 심야 폭주족들.
사람들의 시선이나 카메라 렌즈가 향하기 마련인
절경을 가리고 있는 입산금지 · 출입 금지 현수막.
내가 좋아하는 녹색 계열인 줄 알고 거금을 주고 산 옷이
밖에 나와보니 회색 계열이라 실망을 안겨준 백화점 옷 가게의 조명.
친구가 모친을 요양원에 맡기고 왔다는 얘기.
내 글을 읽지도 않고 '좋아요'를 한꺼번에 다섯 개,
열 개씩이나 다는 절교하고 싶은 SNS 이웃.
나의 최종 직위가 아니라 아주아주 오래전 자신이랑
같이 근무할 때의 낮은 직위로 나를 부르는 오랜만에 만난 옛 상사.
아들딸 다 출가시킨 친구가 아직 '숙제'가 잔뜩 밀려 있는 친구들 앞에서
은퇴 후 경조사에 돈이 너무 많이 나간다고 한탄하는 모습.
그러나 진정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나 자신에게 있다.
갈수록 떨어지는 나의 체력 · 이해력 · 판단력,
그리고 나의 이기심 · 옹졸함 · 냉소주의 · 속물 근성 · 알량한 체면···이다.
삶의 내공이 모자람을 절실히 느낀다.
구체적으로 이런 것들이다.
금연 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학생을 나무라지 못하는 나 자신.
냉장고 문을 열자 몸이 오싹해지면서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는 내 나이.
나보다 적은 나이가 기재된 고관대작의 프로필.
아무 일 없이 끝날 줄 알았던 내시경 검사에서
조직 검사까지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
'연세'를 들먹이며 약도 주사도 수술도 필요 없는,
대책 없는 퇴행성이라는 의사의 진단.
운동 후 개운해야 할 몸이 삼사일 씩이나 힘들어
확실히 예전과 달라진 몸을 깨닫게 해주는 근육통.
몸무게 좀 올려보겠다고 며칠 과식했더니 바로 소화불량,
또 한 번 더 깨닫게 되는 나의 작은 그릇.
잠 들이기 위해 펼친 책이 나를 각성시켜 되레 불면증을 유발할 때.
아들과의 술자리에서 화젯거리가 떨어져 잠시 정적이 흐를 때.
아내에게 괜한 화를 내고는 그까짓 감정 하나 삭이지 못한
나 자신이 실망스러울 때.
대놓고 자식 자랑하는 친구를 경멸하지만 속으로는 부러워하는 나.
나보다 더 나쁜 병을 앓고 있는 친구 얘기를 듣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 한편으론 위안이 될 때.
익히 알고 있는 내 단점을 '진정한 친구' 운운하며 아프게 지적하는 친구.
술 얻어먹은 친구에게 모처럼 내가 쏘겠다고 여럿 불렀는데
정작 주인공이 안 나왔을 때.
나보다 술 약한 친구가 소주 한 잔을 가지고 여러 번 꺾는다고
내게 가당치도 않은 지적질을 할 때.
내 잘못이 분명함에도 온갖 합리화를 동원해서 상대방의 잘못이 더 크다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나이 들수록 억지 같은 합리화 요령만 늘어나는 나 자신.
이처럼 모든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
그럼에도 나 자신으로부터 답을 구하지 않고
밖에서만 답을 구하려 드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한다.
나는 이런 나랑 절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