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으로 가득한 일상의 연속이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는다. 사람에게 신앙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톨스토이는 진지하게 오랫동안 고민하고 물었다. 그리고 오랜 번민 끝에 답을 얻는다. 그의 정직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진지한 삶의 물음을 통해 그는 눈물이 날 정도로 존경스럽고 보기 드문 위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공허함은 3년의 팬데믹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팬데믹은 삶의 가치들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우리의 공허함은 변화하는 낯선 세상에서 새롭게 구축해야 할 가치관들이 의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문제가 큰 이유인 것 같다.
적어도 내가 2~30대 청년기에는 재물의 가치보다는 정의, 진실, 의리, 신뢰, 사랑의 가치를 더 우선순위에 두었었다. 그런데 5~60대 장년기에 접어들어서 세상은 정의, 진실, 의리, 신뢰, 사랑 같은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바보가 되고 오직 재물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고 우상이 되었다. 재물이 없는 사람은 을이고 재물이 많을수록 갑인 세상에서 더욱 낯선 시간들을 맞이한다.
나는 새해부터 청소년보호시설에 들어온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원망하거나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다. 몇몇 아이들이 말하기를 자녀양육할 능력도 없으면서 결혼은 왜 했으며 왜 자신을 낳았냐고 화가 나 죽겠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누구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호화스럽게 생활을 하는데 왜 자신들은 집도 없이 자신들의 방도 없이 지저분하게 반지하에서 월세 살면서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생활해야 하느냐고 항변한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고 모든 것이 못마땅한데 선하고 정직하게 살면 누구에게 좋은 것이냐고 부르짖는다.
우리 사회에서 약자들이 착하게 살면 그들에게 이롭다기보다 권력자나 신에게 이로운 것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 아닌가? 약자들에게 착하게 살아가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강한 자들이 착하게 살면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지 않을까?
어둠을 헤매며 살아가는 청소년들과 있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에겐 희망이 있을까?" 아니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있을까?" 희망이란 뭘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쳐오는 한줄기 빛 같은 것? 막막함 속에서 손톱만큼의 해결고리 같은 것? 고통과 괴로움의 순간이 지나면 곧 고통도 괴로움도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
그래도 아직 살아있음은 희망 때문인가? 톨스토이의 참회록은 그리 쉽게 쓰인 것 같진 않다. 그는 많은 세월을 그렇게 번민하며 삶에 대한 물음을 던졌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인간에게 신앙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불완전한 인간을 가장 인간답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나 또한 나의 질문에 답을 해본다. 살아있기에 희망은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