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해 여름도 더웠지만 마음은 참 시원했는데

내안에 사계(여름)

by 염상규

찌는 듯한 더위에도, 그 여름은 이상하리만치 상쾌하고 설렜다.
도시의 아스팔트 냄새가 지겨워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부모님 손에 이끌려 시골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면, 창문 밖으로 푸른 논과 구불구불한 흙길이 펼쳐졌다.
그 길 끝엔 항상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시던 할머니가 계셨다.
주름진 얼굴엔 늘 햇살 같은 미소가 변져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사촌형과 누나는 이미 나와 있었다.
우린 자그마한 뜰을 지나 뒤뜰의 좁은 오솔길을 따라 개울가로 향하곤 했다.
바위 틈 사이로 졸졸 흐르던 그 개울물은, 마치 우리만의 비밀장소 같았다.
햇살에 반짝이던 물결, 그 시원하게 발끝을 간질이던 물살, 그리고 손에 꼭 쥐었던 그물하나.
작은 송사리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우리 셋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물장구를 쳤다.
가끔은 미끄러운 돌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웃음거리였다.
형은 용감하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몰아줬고, 누나는 잽싸게 바구니를 들고 뒤를 따랐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설픈 손놀림으로 그물을 휘두르며 “잡았다!” 라고 외치기도 하고 어린 동심 가득한 희열을 느끼며 보냈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놀다 보면 배꼽시계가 울리기 시작하고 우리는 흠뻑 젖은채 집으로 뛰어 들어가면 할머니의 구수한 된장국과 손맛으로 만드신 반찬들이 오봉식탁에 차려져 있으면 누가 뭐라 할거도 없이 게걸스럽게 먹던 우리.
밤이 되면 마당에 나와 별을 세었고, 사촌누나는 전설같은 귀신이야기, 사촌형은 벌레를 잡으며 같이 놀았고, 멀리 들리는 개 짖는 소리까지도 그때는 참으로 모든게 정겨웠는데...
그해 여름도 분명히 더웠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모기떼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나는 늘 시원했다.
차가운 개울만이 아니었고, 시원한 수밖때문도 아니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였기에, 자연 속에서 자유로웠기에, 어린 마음에 모든 것이 풍요로웠기에.
시간이 흘러 사촌들과도 자주 못 만나고, 할머니도 안계시지만 여름이 되면 가끔 그 개울가가 떠오른다.
눈을 감으면, 발 끝에 닿던 물살의 느낌과, 그물 속에서 펄떡이던 작은 생명, 그리고 어린 날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해 여름도 더웠지만, 마음은 참 시원했는데.
지금도 그 여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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