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에 사계(가을)
나에게 술은 그저 술일 뿐이다.
소주든, 맥주든, 위스키든, 막걸리든, 그저 기분을 돋우고 잠시 목을 축이는 아이템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와인을 한잔씩 두잔씩 천천히 마시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단순히 목넘김이 좋은 술이 아니라, 그 안에서 천천히 쌓여 있는 세월과 이야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단맛과 쓴맛, 산미와 바디감이라는 말들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나 자주 접하다 보니 어느 순간 와인 속에 숨어 있던 은은한 향과 시간의 깊은 맛이 조금씩 마음에 닿기 시작했다.
한 해, 두 해를 넘기며 숙성된 와인이 무게감을 가지듯, 우리네 인생도 세월을 겪으며 깊이가 더해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와인은 시간을 머금고, 사람은 세월을 품는다.
갓 따낸 포도로 만든 술은 아직 가볍고 거칠지만, 오랜 세월을 숙성시킨 와인은 그 자체로 무게와 품격을 가진다.
우리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젊을 때는 다소 엉성하고 서투른 향을 내지만,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서 마침내 자신만의 향과 빛깔을 내기 시작한다.
가끔 와인잔을 기울이며 그간 살아온 삶을 돌아본다.
달고 쓰고 떫었던 수많은 순간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숙성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서툴렀던 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여유와 현명함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와인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라 한다.
인생 또한 달려가기만 해서는 결코 그 맛을 알 수 없다.
한 모금 머금듯,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며 마음에 스며드는 순간들을 느낄 때 비로소 삶은 깊어진다.
오늘 내 잔에 담긴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지나온 세월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나만의 고찰이 된다.
그리고 그 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다짐한다.
더 오래, 더 깊이 숙성되는 사람이 되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