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겨울 끝자락, 흐르는 강물처럼

내안에 사계(겨울)

by 염상규

한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강이 있었다.
그 강물은 마치 숨을 멈춘 듯, 차갑고 고요한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얼음 아래 흐르는 물줄기는 멈추지 않았지만, 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만 겨우 느껴질 뿐이었다.
하얀 눈과 얼음이 강을 덮은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세상은 마치 잠든 듯 멈춰 있었다.
나무 가지마다 서린 서리와 얼음 결정들은 찬란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침묵을 품고 있었다.
그 차가움 속에 갇혀 있는 강은 말없이 자신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편에도 묵직한 무게와 정체가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누군가와의 다툼, 이루지 못한 꿈, 깊은 상처들이 얼음처럼 내 안에 굳어 있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 속에서 미처 돌보지 못했던 내면의 결빙, 그 차가운 틈들이 겨울 강처럼 나를 꽁꽁 감싸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겨울의 끝자락에 이르러 그 강은 천천히 깨지기 시작했다.
차갑고 두꺼웠던 얼음이 서서히 갈라지고, 맑고 투명한 물줄기가 빛을 받아 반짝이며 흐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조용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살며시 움직이던 그 물살은, 점점 힘을 얻으며 부드럽게 노래를 불렀다.
그 물줄기의 소리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듯했다.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가는 그 감각은 마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생명이 새싹을 틔우는 순간과 같았다.
멈춰 있던 숨이 다시 숨쉬기 시작하고, 얼어붙었던 감정들이 서서히 흐르기 시작했다.
회복은 언제나 느리고 조용하다.
화려하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지만, 그 속에서 깊은 힘과 의미가 담겨 있다.
모든 회복은 긴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스며들고 서서히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드는 시간이다.
강물이 녹아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내 마음의 겨울 또한 그렇게 지나가리라 믿는다.
가끔은 너무 늦은 듯, 멈춘 듯 느껴져도 결국은 반드시 다시 흐르는 물줄기가 있을 것이다.
천천히, 부드럽게, 그리고 깊이있게.
시간을 믿고 기다리는 것만이 진정한 회복의 길임을 알기에.
이제 나는 그 강가에 서서 봄바람에 실려오는 따뜻한 기운을 맞는다.
언젠가 얼음 아래 숨어 있던 내 마음도 빛을 받아 반짝이며 자유롭게 흐를날을 기다리며.
그 강가에 앉아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숨결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과 봄의 경계는, 마치 삶의 굴곡과도 닮아 있었다.
어둠고 차가웠던 시간이 지나고, 조용하지만 분명한 새로운 시작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물이 흐르듯 마음도 흘러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억지로 막아서는 것보다는, 가만히 내버려 두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그 기다림 속에서 마음의 얼음은 녹고, 새로운 빛과 소리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회복이란 어떤 순간의 완성도 아니고, 어떤 눈부신 결실도 아니다.
그것은 꾸준한 흐름이고,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작은 움직임임을.
강물이 다시 흐르듯, 우리 마음도 다시 살아난다.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다시 꿈꾸며, 조용하지만 확실한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때로는 겨울의 얼음처럼 마음이 굳어져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깨어질 듯 흔들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강을 떠올린다.
얼음 밑에서 쉼 없이 흐르는 물처럼, 겉으로는 멈춘 듯 보여도, 내면에서는 삶의 힘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시간은 어느새 봄날의, 햇살을 데려온다.
그 햇살은 따뜻하게 내 마음을 감싸고, 얼었던 감정들을 하나씩 녹여낸다.
진정한 회복은 포근한 햇살과도 같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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