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본은 왜 일찍부터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을까
아무나 붙잡고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제일 첫 번째로 이순신 장군이라 답할 것이다.
물론 훌륭한 왕, 장군, 정치가 등 우리나라는 역사가 길기 때문에 위인들이 엄청 많다.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먼저 꼽을 것이다.
지금 일본이 잘 사는 이유는 다 이순신 장군 덕이다.
물론 나만의 뇌피셜이다.
남들이 뭐라 하던 난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가 반박을 하면 생각을 바꾸지 않고 더 많은 자료를 준비해서 나만의 논리를 체계화할 것이다.
남들에게 강요 또한 하고 싶지 않다.
판단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잠시 전쟁이 멈췄다가 다시 전쟁을 이어함)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특히 평상시 쓰던 전술을 배제하고 다른 전술을 사용했는데 왜군과 거리를 두고 포격으로 전투를 하던 방식을 버리고 육탄전을 방불케 하는 근접전투를 전개했다.
싸워서 이기는 건 중요치 않다.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게 목적이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한 쳐 죽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정벌이 중단되고 모든 왜군들을 본국으로 철수시킨다.
말 그대로 본국에 문제가 생겨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께서 하신 말씀이 감동이다.
“왜군들을 고이 보내주면 저들의 후손이 우리 후손을 업신여기지 않을까 두렵다.
그래서 한놈도 살려서 보낼 수 없다.”
역사적으로 실제 했는지 구전으로 내려온 건지 모르나 후손의 입장에서 들으면 정말 가슴 찡한 이야기다.
명나라 장군으로 온 진린이 철수하는 적을 위험하게 뭐 하러 치냐. 적당히 하고 빠지자는 의견에 이순신 장군께서 펑펑 울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노량해전에서 혼신을 다해 싸우면서 결국에는 가슴에 총탄을 맞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하고 눈을 감으신다.
역사적 사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왜군 군함 350여 척 침몰, 100여 척 조선수군에게 나포, 왜군 15.000명 전사.
조선수군 판옥선 4척 침몰, 병사 300여 명 전사, 명나라 전선 1~2척 침몰, 병사 250여 명 전사.
조선수군은 박 터지게 붙어서 싸웠고 명나라 수군은 슬슬 아껴가며 싸운 거 같다.
특히 고니시 탈출작전을 지원하러 들어갔다가 재건하기 힘들 정도로 군사를 많이 잃은 시마즈 요시히로 와 조선수군의 포위를 뚫고 목숨만 붙여 간신히 탈출한 고니시 유키나가를 주목하자.
당시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견제하던 제2 세력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의 뒷일을 부탁받았지만 히데요시가 죽고 이에야스가 약조를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고 거사를 일으킨다.
2년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모인 동군과 히데요시의 충신들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모인 서 군이 1600년 10월 21일에 세키가하라 에 모여서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가 3시간 동안 치러지고 일본의 운명이 결정됐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임진왜란 때 막대한 타격을 입고 간신히 목숨만 붙이고 돌아간 고니시 유키나가 와 시마즈 요시히로 가 서 군에 포진되었다는 것이다.
대등한 비율로 동군과 서 군이 붙었지만 힘이 많이 빠진 서 군이 패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한다.
중간중간에 싸움의 기세도 중요했고 모리군 히데모토의 배신으로 전투가 불리하게 돌아간 것도 있지만 임진왜란 제1선 봉으로 조선침공을 했던 병법과 무력이 만렙인 고니시 유키나가 와 강력한 장수들과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가 건재했다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결과는 어찌 됬을지 모른다.
전투는 전장에서 사소한 작은 거 하나로도 승패가 바뀐다.
우리 역사상 3대 대첩이라 할 수 있는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만 보더라도 수적 열세와 열악한 장비를 가진 고려군이 불리한 상황임에도 막판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15.000명 기병의 측면공격 하나로 밀리던 전투의 기세가 바뀌며 대승을 하지 않았던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한 건 동아시아 역사에 큰 사건이다.
만약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 군이 승리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리 가 왕위를 계승하고 그의 아비인 히데요시의 조선 명나라 정벌 정책을 계속 고집하면서 일본의 국력은 지속적으로 쇠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와 정반대의 정책으로 자신이 집권하자 에도막부(지금의 도쿄를 옛날에는 에도라 불렀다. 서울을 한양이라 부른 것처럼)가 수립되고 조선에게 사신을 보내 “야 나 히데요시랑 달라. 난 조선 너네랑 잘 지내고 싶어. 지난 일은 사과할게. 하지만 임진왜란은 내가 한 일이 아니잖아. 우리 앞으로 잘 지내자.”
아마도 이에야스는 조선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수군의 강력함을 보았으니 조선이 내실을 다져 전쟁준비를 하고 복수라는 명분으로 공격해 오면 그들 역시 막기 힘들지 않았을까.
내부적으로도 정리가 끝났고 대외적으로도 화친을 만들었으니 그 이후로는 265년간 화려한 에도막부가 열리면서 아무런 시련 없이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며 내실을 다듬고 힘을 키워 나간다.
19세기 후반 메이지천황 때 근대화의 개혁을 이루는 메이지유신을 거쳐 서양문물과 기술력을 받아들이며 제국주의 기틀을 마련하고 시대를 주름잡던 강대국들과 같은 대열에 올라선다.
당시 우리는 갓 쓰고 한복 입고 양반상놈이나 찾고 있을 때 저들은 항공모함을 4척이나 가지고 있었다.
늬들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우리 이순신 장군님 덕이야.
자손 대대로 감사하고 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