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단편선 - <Sümpfe der Verzweiflung> -8-

by 김태광수

책더미 위에서 또다시 무너졌다.
종이의 산은 무덤이었고,
그 위에 엎드린 나는 퇴적된 먼지의 일부였다.
책 사이에 낀 머리카락과 죽은 벌레, 눅눅한 냄새가 나를 덮었다.
호흡은 느려지고, 내 심장은 빛바랜 2000년대 키보드의 리듬으로 뛰었다.

불길한 채점.
무수한 숫자들.
빛바랜 궁서체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위로
붉은 잉크가 흘러내렸다.
잉크는 살갗에 스며들어 체온과 섞였고,
나는 그것이 피인지 잉크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자아평가란 냉혹했다.
기계의 음성 같았다.
단정하고, 절도 있게,
하지만 언제나 너무 늦게 들려왔다.

도피는 면피였고, 면피는 반복이었다.
책장은 늘어붙은 혀처럼 울었고,
방 안의 공기는 눅눅한 실패의 냄새로 굳었다.
커튼 틈새로 빗방울이 흘러들 때마다
벽의 곰팡이가 파문처럼 번졌다.
백지가 나으리라.
그러나 백지조차 썩는다는 사실을 이제 안다.
한 줄의 글씨가 잉크처럼 번져나가면
이미 부패가 시작된 것이다.
단어는 언젠가 다시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

신림동의 골목은 미세하게 진동했다.
전봇대의 전류가 골목마다 전염되었다.
낡은 건물들은 서로의 벽을 파먹으며 버텼다.
어느 벽은 금이 가서 숨을 쉬었고,
어느 창은 방금 죽은 사람의 눈처럼 흐릿하게 빛났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희미하게 흘러가며,
낡은 케이스에 담긴 데이터처럼 겹겹이 덮였다.
그들의 그림자는 오래된 필름처럼 흔들렸다.

비가 내렸다.
곰팡이는 벽을 타고 흐르며 무늬를 남겼다.
벽지는 바스러진 가죽 같았고,
창살은 오래된 뼈처럼 삭아 있었다.
방바닥은 땀과 먼지로 젖었고,
나는 그 위에 엎드려,
바닥 밑으로 스며드는 소리를 들었다.
전선이 타들어가는 냄새,
습기 먹은 종이의 숨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떨어지는 빗물의 천천한 추락음.
그 소리는 심장의 규칙을 흉내냈다.

책 속의 글자들이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단어들이 엉기고, 문장들이 분해되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고요였다.
밤마다, 그들은 새로운 문장을 낳았다.
나의 이름과 닮은 문장들을.
어제 쓴 글은 오늘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글자는 나를 기록하는 대신, 나를 먹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책이 되어갔다.
살이 종이처럼 말라가고,
혈관이 잉크의 줄기를 닮았다.
손끝마다 글씨가 돋아났고,
피부는 오래된 표지처럼 갈라졌다.
내가 한숨을 내쉴 때마다 먼지가 일었고,
그 먼지 속엔 잘게 부서진 나의 이름들이 있었다.

노량진의 강물은 어둠보다 느리게 흘렀다.
폐수와 종이 찌꺼기,
버려진 이력서들이 뒤엉켜 흐르는 물.
그 속에 나와 같은 것들이 떠다녔다.
모두가 불합격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강물은 부드럽고, 묵직했다.
썩은 공기의 무게가 그 안에 고여 있었다.
나는 강가의 펜스에 손을 얹었다.
녹슨 금속이 체온을 빨아들이며 내 살을 먹었다.

달빛은 강철의 빛이었다.
나는 그 빛 아래에서 녹슬었다.
육신의 틈새마다 습기가 배어들었고,
생각은 점점 느려졌다.
꿈은 눅눅한 기억으로 변했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내 안의 곰팡이가 말했다.
“이제 너는 잊혀질 것이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목소리의 형태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체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신선하기 그지없는, 방금 인쇄된 냄새.
그 냄새는 잉크와 먼지, 젖은 나무의 합성물이었다.
모두가 그 냄새를 맡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냄새는 이 도시의 냄새였기 때문이다.
태어난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숨쉬는 냄새,
새벽 첫 전철의 차가운 바퀴소리에 섞인 냄새였다.

신림의 새벽은 늘 비슷했다.
형광등은 하얗게 울고,
컴퓨터 팬은 죽은 듯 돌아가고,
사람들은 자신보다 오래된 빛에 매달렸다.
창문 밖으로는 누군가의 삶이 꺼진 네온이 스산하게 반짝였다.
그 불빛이 바로 내 심장의 박동이었다.

나는 여전히 책더미 위에 누워 있다.
종이의 결을 따라 흐르는 작은 곰팡이 포자가
내 얼굴을 덮는다.
그 포자들이 내 눈에 들어와 번식을 시작한다.
나는 천천히 잊혀지고 있다.
내 이름은 이제 이 기록 속에 썩어가고 있다.
이 도시는 오래된 기록처럼 냄새가 났다.
부패의 냄새,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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