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선 <옴니시아를 위한 비가> -1-
※ 이 시리즈는 비정기적·실험적 성격을 지닌 글입니다.
다소 낯설거나 강렬한 표현이 포함될 수 있으니, 독서에 참고해 주세요.
-0-
박살 난 도심 위로. 화염의 역겹고도 따스한 체취가 몰려온다. 젊음은 불타는 것. 내 삶은 전장 위에 치열하게 타오른다. 슬픔도 증오도 언젠가는 물 고인 진흙탕 위에 무기력하게 삭아 버릴 터.
화포의 불꽃에 찢겨지든 고대의 야만 문명 마냥 난 그저 한 그루 나무의 뼈 장식이 되고 싶을 뿐. 네이팜도, 화염방사기도 백린의 창백한 백광처럼 공허한 전장의 어둠 위에 화려하게 내리 쬐어줄적...
업화의 불꽃이 따스하게 비추거든 발광하듯 춤을 추고 싶건만...
-1-
2024년. 12월.
눈은 없었고, 대지는 굳어 있었다.
말라죽은 밀밭. 불탄 송진의 냄새.
드론도, 포격도 사라진 전장의 정적.
여긴 끝이다.
나는 종말의 잔해에서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 있는 척을 하고 있다.
신은 없다.
신은 적어도, 나에겐 없었다.
가난했고, 무지했고, 과거가 더러웠다.
이제 그 어떤 자격도 없다며
사람들은 날 지워버렸다.
그래, 나도 그랬다.
내 과오를, 내 죄를,
내가 만든 운명이라 수긍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난 이 인생을 택한 적이 없었다.
한때 나는 ‘의리’를 말하며 손가락을 잘라냈다.
고작, 쓰레기들 사이에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
그 뒤로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다.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전쟁을 택했다.
공명심이었다.
오직 한 사람이라도 내 이름을 기억하길 바랐다.
그리고 이곳,
국적 없는 분쟁지대에 도착했다.
발라클라바. 낡은 군복을 입고.
-2-
화약의 연기가
내 희미한 숨결아래에
천천히 새어 나올 적.
부서진 장갑에서 뜯겨 나온
차가운 서늘함이
무수한 포격 소리를 가로막고는
서서히 침묵을 속삭인다.
회고했다.
총구의 불꽃이 검붉은 색채로
화려하게 꽃 피울 적.
쓰디쓴 마약으로도 달랠 수 없던
마음의 공허는 어두운 밤.
참호 위에 떠다니는
공포스러운 조명탄을
축제의 불꽃삼아
이름 조차 모를
이방인의 전우에게
달래보려했던 것 따위들...
복부가 찢겨 있다.
내장이 고요히 흘러나온다.
지혈은 불가능하다.
붉은 온기는 황토색 진창 위로 퍼져간다.
곧, 끝이 온다.
하지만 이상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진짜 두려운 건,
누구도 기억해 줄 이 하나도 없다는 것.
모두 떠났다.
동료. 싸늘한 시체들.
포화가 남긴 형체들 속에,
나 혼자 남았다.
나를 부르지 않는다 .그 누구도.
확신이 든다. 이제야.
완전한 이탈.
세상으로의.
-3-1
전쟁은 내 버팀목이었지.
전장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사람 죽는 훈련소도,
동기들이 거의 다 죽어가도,
버텨 서 있을 이유가 거기 있었다.
허탈하다.
손에쥔 야삽마저 힘에 겹다.
진동.
벌레와도 다른, 기계의 날갯짓.
고막을 긁는 고주파.
하늘을 본다.
뭔가 떠 있다.
DJI. 민수용.
구식 드론.
전쟁 초반, 양측에서 흔히 쓰이던.
지금은 전시회나 장식품처럼 취급받는 구형.
그 낡은 기계가
나를 향해 다가온다.
렌즈가 있다.
검은 유리.
내 얼굴을 훑는다.
나는 렌즈를 바라본다.
카메라가 나를 삼킨다.
저 너머 어딘가.
벙커, SNS 송출 채널, 중계기지.
어딘가에 있는 적이
지금 이 장면을 본다.
아마도 조롱하겠지.
‘침략자의 최후’라고.
‘우스꽝스러운 죽음’이라고.
조용하다.
그 어떤 말도,
비명도,
총성도 없다.
나를 바라볼 뿐.
멈추지 않고.
외면하지도 않고.
이 침묵.
왜 인지 모르게 무겁다.
-3-2
썩은 악취도 가래에 끓여
이젠 비명조차
들려오지 않을것이다.
아려오는 고통은
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저 솜털 같은 가시덩어리로
무참히도 훔쳐오겠지.
망가진 과거였기에,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다.
피로 아로새긴 월급을
불우한 자에게 기부하며
나는 새로운 시작이라 믿어왔다.
그 신념이, 결국
왜 이토록 엇나가버렸는지...
드론이 천천히 움직인다.
더 가까이, 내 눈앞까지 다가온다.
카메라는 여전히 나를 응시한다.
그런데—
기체 하부에서 뭔가 떨어진다.
흰색.
작은 종이조각.
구겨진 쪽지.
미약한 실낱줄에 달린 채 천천히 낙하한다.
나는 손을 뻗는다.
쥔다.
힘겹게 펼친다.
한 줄.
딱 한 문장.
'도움이 필요한가.'
구겨진 종이 사이로 새겨진
어느 키릴문자들.
기계 프린트가 아니다.
손글씨.
누군가 썼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
나는 웃는다.
이건 환각이다.
이해할 수 없다.
적이 이런 질문을 할 리 없다.
그러나 이건 분명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나를 그대로, 있는 그대로,
끝까지 지켜본다.
그리고, 묻는다.
마지막 선택을.
나는 복부를 가리킨다.
핏덩어리. 찢긴 창자.
손가락이 떨린다.
입술이 말라붙는다.
작게, 고개를 젓는다.
“끝났어. 구하지 마.”
그리고 덧붙인다.
“난 적이야.”
렌즈는 반응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정적 속에서—
모든 것이 구원된다.
증오의 시선조차
끝내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4-
잿더미는 이윽고
하얀 분진으로 떨어져
가쁘게 헐떡이는 숨결마저 괴롭다.
무릎을 짚고 일어난다.
눈물이 흐른다.
언젠가부터
울 수 없게 되었던 내가
지금, 끝내 운다.
주머니. 손가락.
담배 하나.
마지막.
불을 붙인다.
불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입에 문다.
고개를 든다.
렌즈를 향해,
가장 그럴싸한 장면을 남긴다.
연기 사이로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죽었다.
그저 손짓 하나.
이것이 나의 임종이다.
나를 증오했으리라.
내 휘갈기던 5.45mm 총알로
수없이 없어졌을
동료들과 가족들 따위들.
살아 있을 때는 분명히.
하지만 지금,
그들은 끝까지 나를 응시했다.
그게 어쩌면...
가장 정중한 애도였을지도.
-5-
렌즈는 떠오른다. 그러나, 망설였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 눈. 쏠 수 있었다.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듯했다.
아무도 맞지 않았다. 누구를 죽이기 위함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내 손으로 마지막 장면을 마무리짓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은 저항이 아니었다.
그저 허공을 헤매는 나의 마지막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 절망에 그들은 가장 정중한 답을 주었다.
허공을 긋는 한 줄. 내 삶 전체에 그어놓는 가장 조용한 사선
이번엔 작동했다.
세상이 찢기듯 흩어졌다.
무언가 또다시 떨어진다.
원형. 은빛.
수류탄.
폭발.
페이드 아웃.
슬픔도 이제는 안녕.
정말, 좋은 인생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
-에필로그-
...
죽으면 새가 되어 날아간다는 이야기.
길다란 다리를 한 백학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뿌려질 유해
라스푸티차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어리석은 화석으로 후대에 남겨질 것이다.
'죽어갈테니 말을 말거라...'
뇌까린다.
그럼에도 이 순간은 거짓은 아니니까.
...
내 전투복 위에 새하얀 수의가 덮여온다.
이제는 그 누구도.
이제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