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약은 나의 안전벨트

1. 약 복용과 일상의 통제

by 박하루

내 하루는 약을 먹는 걸로 마무리된다.


뇌전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난 후,

가장 먼저 바뀐 건 몸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약을 먹는 일이

그날 하루의 컨디션을 좌우하게 되었고,

한 알의 약이 나의 리듬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약을 챙겨 먹는 일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었다.

너무 늦게 먹어도 안 되고,

외출을 하더라도 약은 꼭 챙겨야 했다.

하루에 한 번만 실수해도,

그날의 평온은 보장되지 않았다.


처음엔 알람을 맞췄고,

나중엔 몸이 먼저 약을 기억했다.

몸속에서 ‘잊지 마’라고 속삭이는 듯한 그 긴장은

언제부터인가 하루를 계획하는 기준이 되었다.


친구와의 여행, 갑작스러운 약속,

밤이 길어지는 모임 속에서도

나는 언제 약을 먹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가방엔 항상 약이 있었고,

약이 빠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

불안이 먼저 엄습해왔다.

약 하나가 빠진 하루는,

나에겐 너무 많은 가능성을 감당해야 하는 날이 되었다.


때로는 약에 통제당하는 삶이

답답하고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나를 조절하는 게 아니라,

약이 나를 조절하는 것 같아서.

내가 시간을 쥐고 있는 게 아니라,

약이 시간을 나눠주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그 알약을 삼킨다.

그건 내 하루를 지키기 위한

작고 단단한 루틴이고,

아무도 모르는 내 방식의 생존이다.


약은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진 못했지만,

그나마 평온하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어김없이 약을 삼키며 하루를 닫는다.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무사히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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