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아내는 중입니다

3. 다시 기록하기로 했다, 조용히 살아낸 날들을.

by 박하루

나는 원래 남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손글씨로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

별 의미 없는 순간까지 담아두던 사진.

기억을 붙잡아두는 일이 나에겐 취미이자,

삶을 더 선명하게 느끼게 해주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뇌전증 진단을 받은 이후,

나는 그 모든 ‘남김’을 멈췄다.

일기도, 사진도, 그날의 감정도.

하루의 기록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허무하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하루를 버티는 데에 집중하는 나에겐 무언가를 기록할 여유도, 그럴 의미도 없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기록하는 것은 결국엔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인데, 그 과정에서 내가 다시 마주치게 될 감정들이 두려웠다.

그 당시 나는 병을 마주할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고, 그 위에 내 마음을 얹어 문장으로 만든다는 게 이미 아팠던 시간을 다시 꺼내어 견뎌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피하고 싶은 것들을 굳이 꺼내놓고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조금은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말하지 못한 채 쌓여 있던 감정들이 오히려 더 크게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차곡차곡 눌러둔 감정은 언젠가 예고 없이, 아주 엉뚱한 순간에 터져버릴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쓰기로 했다.

크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에서 조용히, 조심스럽게. 내 속을 꺼내어 한 문장씩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글은 용기를 내어 쓰는 기록이다.

병을 내 삶의 중심에 두기보다, 그로 인해 흔들렸던 내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겨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도 살아내는 중이라는 고백.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조금 더 단단히 붙잡기 위해 쓰는 문장들이다.

말로 하기 어려운 마음들을, 글로라도 꺼내 놓기 위해.


그렇게 나는 오늘도 다시 쓰고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언어로 적어나가고 있다.

조용히 살아낸 날들을 꺼내어 다시 바라보는 일.

그것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고, 잃어버린 나를 조금씩 되찾게 만든다.

이 기록들이 언젠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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