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억이 끊긴 날

1. 처음 겪은 발작과 단절

by 박하루

20살 여름,

대학교 강의를 마치고 친구들과 집에 가던 길이었다. 내 기억은 분명히 대학교 교문 근처에서 멈춰 있다.

그다음은 친구들의 증언으로만 이어진다.

내가 갑자기 멈췄고, 말이 어눌해지더니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고 했다. 눈동자가 돌아가고,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으며, 입에 거품까지 물었다는 그 장면은 나만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날, 나 없이 쓰러졌고, 나 없이 응급실에 실려 갔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 침대 위였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릿속은 흐릿했고 세상은 낯설었다. 곁에서 날 지켜보던 친구들과 가족들의 표정에는 놀람과 당황, 그리고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들이 놀란 만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인데, 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의사 선생님은 일시적인 저혈압이나 스트레스성 실신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평소 저혈압이 심해 어지럼증이 잦았던 터라, 나도 가족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랬나 보다’며 서로를 위로하고, 그렇게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몇 달 뒤, 가을의 아침.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난 바로 그 순간, 나는 또다시 사라졌다. 1교시 수업을 준비하던 이른 새벽. “쿵” 하는 소리에 놀란 엄마가 거실로 뛰쳐나와 화장실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또 한 번, 의식이 없는 채로 응급실로 향했다.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혀끝의 통증이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피맛과 아릿한 감각. 경련 중에 혀를 깨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온몸은 근육통인지 찌릿하게 아팠고,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하얬고, 감각은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번에 만난 의사 선생님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뇌전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원하지 않던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대형 병원에서 뇌파 검사와 MRI, 다양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받은 진단은 ‘원인 불명의 뇌전증’. 명확한 원인도 없고, 완치에 대한 보장도 없었다. “완치보다는 관리가 중요합니다.” 그 말이 내가 받은 유일한 방향이자 대답이었다. 병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조건’처럼 느껴졌다.


진단 이후, 약은 내 일상이 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해진 시간에 알약을 삼켜야 했다. 27살이 된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작은 알약이지만, 그 안엔 언제나 경고가 담겨 있었다. “이 약을 잊지 마세요. 당신은 환자니까요.” 그 문장이 나를 억누르기도 했고, 동시에 나를 지켜주기도 했다.


가끔은 생각한다. 처음 쓰러졌던 그날, 나는 내 일부를 떠나보낸 것 같았다. 몸이 기억을 끊고, 정신이 빠져나가고, 나는 나를 놓쳤다. 그전까지는 나의 모든 것이 나에게 속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몸과 기억조차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날 이후의 삶은 ‘기억이 없는 시간’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는 일이 되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품고, 또다시 일어날까 봐 조심조심 하루를 살아간다. 평범했던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그 낯설어진 삶을 매일같이 새로이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keyword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4화1. 살아내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