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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미 Sep 24. 2022

4. 가족의 마음이 심기다

아픔이 씨앗이 되어 심겨 열매 맺다.

심기다

1. 동사 주다. 전하다

2. 초목의 뿌리나 씨앗 따위가 묻히다.

3. 심기(心機) 마음의 움직임.




가족의 마음이 심기다.
 
 사랑누리의 설립 초창기 시절에 어느 자리에서 기관 설립자로, 원장으로 소개되면 부끄러웠다. 그리고 모두 궁금해하는 장애인복지시설을 설립하게 된 이유에는 꼭 남편이 있었다.

“남편이 이렇게 일하는 것 괜찮아해요?”

“젊은 새댁이 아직 신혼인데 장애인이랑 사는 거 힘들지 않아요? 본인이야 사명이라고 해도, 남편은 말 안 해도 힘들어할 텐데….”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내게 건네는 말들에 남편의 생각과 자라온 환경을 이야기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장애와 많은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이다. 남편 또한 장애와 많은 부분이 연관된 사람이었다. 월남전에 참전하셔서 지체 장애를 가지고 계셨던 아버님도, 지적장애가 있는 하나뿐인 여동생도 그 사람에게 가족이란 고리로 필연적으로 장애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남편이 평생 가슴 아파하는 이야기. 시누이를 잃어버렸던 일이 우리 부부가 시설을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시어머님이 남편이 초등학교 시절 떠나시고, 할머님이 남편과 시누이를 돌보셨다고 한다. 군대 갈 만큼 장성했을 때, 시아버님은 여러 직업을 거쳐 당시에는 지방을 자주 다니는 목재 조각일을 하셨다고 한다. 강원도 화천에서 복무하던 남편이 상병을 달았던 즈음 할머니가 계단에서 넘어지셔서 대퇴부 관절을 다치셨다. 할머님은 위중하셨고, 오랜 입원생활에 큰댁의 간병과 도움을 받기 위해 서울의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셨다. 할머님의 병세도 걱정이었지만, 아버님은 지적장애가 있는 딸도 큰 걱정이었다. 노을 지는 저녁 무렵 흙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들어서는 모습에 한숨을 쉬고, 세상 물정 모르고 마냥 신나는 웃음 짓는 딸이 아버님의 눈에는 눈물로 맺혀가는 때였다. 지적장애가 있던 딸을 돌볼 사람이 없어 아버님은 시누이를 데리고 일을 나가셨다고 한다. 일의 진척은 미진했고, 가난은 더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지방에서 꽤 괜찮은 일이 들어왔다. 넉넉한 보수에 놓칠세라 급히 일을 가시게 되셨다. 밤에라도 돌아오겠다고 옆집 아주머니에게 밥상을 챙겨주라고 부탁하고 지방을 다녀오셨는데, 늦은 밤 방문을 열었을 땐 밥과 반찬 몇 가지가 싸늘히 식어 있었고. 어디에도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군 복무 중 그 소식을 듣고 바로 나올 수 없어 밤새워 뒤척였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그때의 갑갑한 마음이 느껴졌다. 부대의 허락을 받아 2박 3일의 휴가 동안 아버님과 방방곡곡을 다니며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러나 동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휴가 복귀하지 않고 하루만 더 찾아볼 수 없을까 눈물과 간절함으로 다녔다고 한다. 그 뒤로도 휴가를 나올 때면 전국의 시설들을 다니며, 동생을 찾아다녔다. 동생을 잃어버린 그 마음이 힘들었을까.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군을 전역하고 6개월의 시간을 더 동생을 만나기 위해 백방을 수소문하였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해 텔레비전의 뉴스는 IMF로 시작하였고, 나라 전체가 캄캄하고 절망이라는 습기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가정의 경제적 상황은 당장 먹고사는 일이 막막한 시기였고, 그에게도 인생의 암흑기였다.

3년 만에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았다. 그동안 동생이 노숙인 시설에 있어서 그렇게 찾아다녀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장애가 있으니 당연히 장애인시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국의 장애인시설만 찾아다녔는데,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노숙인 시설에서 장애인 복지시설로 옮기게 되어 그 일을 계기로 겨우 찾았는데, 그동안 시설에서 겪은 일들은 구체적으로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 시간들은 우리 가족에게는 떠올리면 안 될 것 같은 불문율이 되었고, 그때 동생이 겪었던 마음 아픈 일들은 남편의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이러한 마음 아픈 가정사는 남편에게 꿈을 가지게 하였다. 그것은 장애인 복지를 하는 아내를 만나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이왕이면 가정 같은 공간, 내 가족이 살아도 마음이 편한 공간, 그래서 두 번째 장애인에게 우리 집과 같은 공간을 만드는 희망이 생겨났다.

  우리는 데이트하는 동안에도 우리가 하고 싶은 장애인 복지를 서로 이야기하였고, 처음에는 결혼 후 3년 안에 장애인 공동생활가정을 설립해 보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더 이르게, 환경이 급박하게 몰아치며 결혼 후 6개월 만에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지난날을 되짚어 보면, 남편이 없이는 사랑누리의 설립이 이루어졌을까 생각해보면, 가능성 0%이다. 사랑누리 단기보호센터를 설립할 때도 80곳이 넘는 곳을 살펴보고 부동산 계약을 하였고, 철거부터 리모델링을 할 때도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시멘트 포대를 나르며, 땡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될 때까지 땀 흘리고 노력했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누리가 있었다. 그의 수고와 노력이 창틀 하나 문틈 하나에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남편은 본인이 발달장애인의 가족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가족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발달장애인의 부모님과 상담 전화하고 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내게 그가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있잖아, 조금 더 친절하면 어떨까?”

“내가 안 친절해? 나는 상냥하다는 말 많이 듣는데… 어떻게 더 친절해?”

“음, 그 엄마는 말이야, 너에게 전화하기 위해서 열 번은 더 고민했을 거야. 혹시 불편한 것 이야기하면 우리 아이가 미움받지 않을까. 내가 걱정하는 것이 선생님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그 수많은 고민 끝에 네게 전화한 거야. 그러니 조금 더 친절해지길 부탁할게.”


나는 열정 넘치는 사회복지사였지만 복지시설을 이용하는 이용자 가족의 마음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서 장애인 가족의 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나의 태도나 마음가짐도 변화되었다.

나는 그냥 장애인 복지 현장의 사회복지사였을 뿐이었지만 남편을 만나 가족의 마음이 심어졌고, 사랑누리로 자라나 꽃 피우게 되었다. 남편이 겪었던 아픔이 씨앗이 되었고 우리 가정에서 심 기워져 사랑누리라는 이름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 집이라는 열매를 맺어간다.  그러고 보면 그 아픔의 시간들은 봄이었나 보다. 씨앗으로 심기운 시간, 아직은 코끝 서늘하지만 햇살이 다가올 날들을 기대하게 하는 그런 봄과 같은 시간이었나 보다. 그날들을 회상하며 이해인 수녀님의 봄 일기라는 시를 나지막이 되새겨본다.  


누군가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

-이해인 '봄 일기'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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