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초저출산 국가로 아기 울음은 사라져가고 늙어 가는 한국이 되었다. 이른바 고령화 시대에 도달했다. 그 거부하기 힘든 노년의 길, 초입에 들어선 나로서도 서글픈 일이지만 인류는 팬데믹의 시대, 건강 수명보다는 질병 수명 쪽으로 행로를 바꾸고 있다. 대세를 이룬 그 길에서 낙오가 되지 않으려면 늙어 가는 것보다 나이 듦의 지혜가 절실하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점점 혼자가 되어가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열망이 옅어져 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래되고 익숙한 것들이 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쇠락해져가는 몸은 게으름에 안주하게 되고 정신은 몸과 함께 느슨해져간다. 건강한 노년을 갈망한다면 유난스럽게 부지런을 떨어야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천명의 나이가 넘어서도 세상 풍파에 단단하고 여민 내공으로 맞서는 것도 쉽지만 은 않다. 가끔은 구체적으로 몇 살까지 현재의 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지를 떠올려 본다거나, 난데없이 희끗한 새치가 스멀스멀 올라온 정수리를 볼라 치면 물에 젖은 솜처럼 '나이'의 무게에 순간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해 갈 수 없는 인체의 노화 앞에 무기력해질 순 없다.
나이가 들어간다며 갑자기 이전과 다른 삶에 대한 절박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여태까지의 삶의 가치도 변화가 필요하지도 않다. 다만 평소 책 한 권 읽지 않는 빈약한 지적 운동량은 문제가 심각하며 비난받아 마땅하다. 꼰대가 되어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기민하고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들 앞에 시대정신에 뒤떨어진 어른들의‘이래라저래라’개입하는 모양새는 전형적 바보의 어투이기 때문이다. 이럴 땐 나이 듦의 화법이 아닌 늙은 화법이 되어 설득도 공감도 없다. 빛바랜 나이가 된다.
열혈 청춘의 삶이 꿈이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마음 중심의 삶이었다면, 나이 듦이란 결국 몸 중심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 몸의 요구와 마음의 요구가 나름 균형을 이룬 상태가 맞을 것이다. 영원히 미완결인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건강관리만큼 마음 관리도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언제가 다가올 죽음에 대한 성찰, 병원에 의탁하지 않고도 나이 든 몸과 마음을 일상 속에서 건강하게 지키는 나만의 삶의 루틴을 발견하는 일은 나이 들어가는 모든 어른들의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평소 생활환경에 따라 수명이 좌우된다는 후성유전학적 관점에 따른 건강 관리법, 나이의 경험치를 근간으로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마음 관리법, 가장 엄혹한 질병인 치매를 예방하는 일상적 습관과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까지 불안하고 두렵기만 한 나이 듦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현명하게 대처해 나갈지를 말이다.
세상천지의 인생 개수만큼 나이 듦 역시 저마다가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구나가 다 먹는 나이이기에 별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사람들은 각자 다 다른 방식으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제 살기 버거워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민주주의, 시민 사회라는 구호 속 시대에서 삶의 다양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나이 듦의 다양성 또한 고려돼야 한다. 그리하면 고령화로 치닫는 한국 사회 노년들의 삶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노년의 다양함에 대한 인정이 경제적인 조건 자체를 향상시켜주진 않을지 몰라도 각기 다름을 인정받을 때 나이 들어가는 이들의 자존감은 회복되고 저마다의 노년의 길을 찾아가기가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가는 이들에게 사회로부터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완숙하게 익어가며 인생의 지혜를 터득해가는 나이 듦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일, 고령화 사회의 태도가 되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