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는 어르신 취미인 줄 알았는데
올해 겨울이 유독 습하고 흐리다. 봄으로 넘어가는 와중에서도 겨울장마인지 빛도 잘 안 든다. 그래서 더욱더 집에 있는 식물들은 쭈글해지지만, 입춘이 있는 2월 초부터는 꽃시장들이 봄을 준비하기 때문에 농장에서 길러진 꽃보기 식물들이 새로 출하되어 꽃시장만은 살아있음으로 넘친다.
잎을 감상하는 관엽식물과 달리, 꽃보기식물들은 조금 더 키우기가 어렵다. 식물에 있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임신 출산과 같다. 많은 노력과 환경 맞춰주기 및 약간의 운도 필요하다.(대부분 집안 환경에서는 빛부족 문제가 있다.). 달달한 냄새는 특히 곤충을 꼬이게 한다. 인간의 집 안에서는 반갑지 않은 존재들이다. 무엇보다 꽃이 피는 잠깐의 시간 이외에는 기르고 돌보는 낙을 찾기가 어렵다. 대부분 이파리는 길에서 볼 수 있는 풀떼기에 가까운 외형이다보니 매일 돌보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늘 꽃보기식물은 꽃시장에서 보는 데서 만족하곤 했다. 작년엔 벌레잡이 제비꽃을 두 개체 키워봤는데, 꽃이 후한 편이긴 했지만 여름이 되면 더워서 죽어버리곤 했다.
작년에 처음 구매한 난초는 의외로 관엽 개념으로 샀었다. 소형 난초인 덴드로비움 레오니스로 너무 작고 깜찍한 잎의 모양에 반해서… 원종이라 약간 비싼 가격을 주고 사면서 주인장에게 ”처음이면 꽃을 피우기 어려우실텐데“ 라는 얘기를 들었다. 저는… 관엽으로 사는 것입니다만? 하지만 왠지 사장님은 꽃 사진만 계속 보여주셨고…. 꽃보기 인간과 잎보기 인간의 간극을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https://plantshower.xyz/view/105/113 덴드로비움 레오니스
토분에 수태로 식재되어 있었는데 마를 때마다 저면관수로 물을 주고 식물등 밑에서 길렀더니 잎이 타고 과습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난초가 처음이다보니 잎이 타고 과습이 온다는 걸 몰랐다가 남의 식물 사진을 보고 알게 되었다.(그래서 시간순으로 식물 사진과 설명을 등록하고 이어서 보여주는 플랜트샤워의 현재 시스템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작이란 착생식물의 특징을 이용하여 나무나 돌 등에 수태와 식물의 뿌리를 함께 고정하는 식재 형태를 말한다. 일단 공기가 잘 통하므로 과습이 올 리가 없지만 물을… 담그든 뿌리든 거의 매일 줘야 한다. 공기가 잘 통하는 만큼 수태도 빠르게 마르기 때문이다.
부작이라는 이름이 거창해서 그렇지 생각보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아무데다가 물에 30분 정도 불린 수태를 대충 얇게 붙인 뒤 그 위에 난초의 뿌리를 고정하고 수태를 그 위에 덮는다.
그리고 실이든 낚시줄이든 아무거나… 얇은 줄로 둘둘 말아서 고정하면 끝이다. 굴피나 유목같은 나무로 만든 간지 아이템에 많이 하지만, 난초가 주력은 아니라 그런 재료들이 없었다. 그래서 기존 토분 겉면에 매달아서 하거나, 화분 깔망을 대충 파우치처럼 만들어서 하기도 했다. 굉장히 강한 생존력을 가지고 있어서 무엇에 하든 사실 상관이 없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다. 토분 부작은 거의 매일 물이 마르기 때문에 오목한 접시를 받치고 저면관수처럼 주고, 깔망 부작은 마를 때마다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있다. 둘 다 매일 물을 공급해야 하는 귀찮음이 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라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수태 중 저렴한 칠레산은 이물질이 많아 뿌리가 썩을 수 있으므로, 특히 초보일 수록 좀 비싼 뉴질랜드산 수태를 사용해야 한다. A가 많을 수록 등급이 높은 것인데 등급이 높을 수록 좋다.
이렇게 한 번 키워보니, 나름의… 난초를 기르는 요령이 생겼다. 덴드로비움에 과습이 생기고 탔을 때 정확히 동일한 잎 형태의 앙그레컴 디스티쿰이라는 난초를 샀는데 열대 출신인 덴드로비움이 아프리카 출신인 앙그레컴보다 우리집 환경을 잘 견뎌서, 덴드로비움은 살아있고 앙그레컴은 죽었다.
한편 덴드로비움 레오니스는 타는 자리를 피해 줬더니 마구 웃자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아있으니 괜… 괜찮아….
뭐, 대충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열대 자생지 출신인 서양란 중 꽃봉오리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사면 다음에 꽃은 못 피워도 우리집 환경에서 살아갈 수는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고 이 친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덴드로비움
호접란(팔레놉시스)
카틀레야
온시디움
파피오페딜럼
난초는 서양란과 동양란이 있는데, 자생지 기준이 아니라 어느 문화권에서 소비되어왔는가를 기준으로 나눈다. 원종의 경우 대부분 자생지는 동남아시아 열대지방이며, 드물게 호주인 것도 있다. 서양란은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서 소비되고 개발된 품종들인데 종류라면 무수히 많지만 초보자가 접근할 수 있는 종류는 저 다섯 종류의 속인 것 같다.
꽃보기 식물을 들여오기로 했으니 자신의 취향이 어느쪽인지를 알아야 했다. 나에겐 굉장히 일관적인 취향이 하나 있는데 큰 잎이 주는 풍성함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동물도 얼굴이 큰 둔둔이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꽃도 얼굴이 큰… 얼큰이들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
난초 세계에서는 얼큰이를 대륜종이라고 하던데 카틀레야 중에서는 꽃사이즈만 20cm에 달하는 녀석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은 비… 싸.
그래서 결국 선택하게 된 친구들은 원예용으로 개량된 호접란이다. 그… 어르신들이 개업 선물로 주고 받는 그 흔한 난초다. 양재 꽃시장 지나다니면서 많이 봤는데 대부분 일년 내내 이런.. 꽃무더기 상태로 있으니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유명한 난농원들이 파는 비…싼 원종을 보다가 갑자기 이런 색색깔의 호접란을 보니 너무 예뻤다. 화분에 크게 식재되어 있는 선물용은 비싸지만(보통 10만원에서 시작하는 듯) 비닐 포트에 들어있는 건 대부분 만 원대다. 2년간 식물을 길러보니 보통 싸고 흔한 것들이 기르기 쉽다.
특이한 건 비닐포트에 담긴 원예용 호접란들은 온오프라인 가격 차이가 있는 편이다. 아무래도 꽃이 안전하게 오려면 포장을 더 많이 해야 해서 그런 건지…. 확실히 오프라인 꽃시장 쪽이 더 싸고 꽃이 오면서 손상될 염려도 적은 편이다.
다른 종류에 비해 호접란은 꽃피는 기간(화기)가 긴 편이다. 카틀레야는 종류마다 다르지만 보통 10일 정도인데, 호접란은 3개월 이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카틀레야나 덴드로비움은 강광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호접란은 실내의 빛이 약한 환경에서도 괜찮다고 한다. 아무리 관엽 덕후의 관점으로 잎 모양을 감당할 수 있는 걸 산다고 해도 꽃보기 기간 10일과 3개월은 취향을 넘어설 수 있는 차이였다. 실제로 카틀레야와 온시디움 계열의 교잡종인 디가모아라 화이트 페어리는 꽃이 절반쯤 졌는데 호접란은 아직도 꽃이 짱짱하다.
호접란 아바타 https://plantshower.xyz/view/387/237
물감으로 염색한 색이지만 색이 빠지는 것조차 귀엽다.
호접란 종류미상 https://plantshower.xyz/view/304/242
원예용 호접란들은 이름을 정확하게 안 붙이고 파는 경우가 많고 이름도 특이… 아니 좀 이상하게 짓는 경우들도 많다. 학명을 호명하는 관엽 희귀식물(?)의 세계에서 온 사람은 한동안 적응을 못 했다.
호접란 삼색조 https://plantshower.xyz/view/391/243
노란색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호접란 삼색조. 호접란들은 색이 화려할 수록 꽃이 작아 크지는 않지만 배색이 귀엽다.
카틀레야 프린세스 기코 https://plantshower.xyz/view/386/236
꽃시장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카틀레야 중 하나로 흔하지만 예쁘다!
디가모아라 윈터 원더랜드 “화이트 페어리” https://plantshower.xyz/view/385/232
온시디움 계열의 교잡종으로 저렴이 중 가장 얼큰이다. 나는 이원 난농원에서 샀는데 양재 꽃시장에서도 은근히 팔고 있었다. 꽃도 얼큰이가 최고라는 취향을 일깨워준 식물이다.
파피오페딜럼 델레나티 https://plantshower.xyz/view/390/241
파피오페딜럼속 식물들은 대부분 꽃이 꽃… 보다는 포켓몬에 가깝게 생겼는데 꽃처럼 생긴 유일한 식물이다. 사진으로는 귀여운데 실제로도 그런 지는 모르겠다. 꽃봉오리가 엄청 느리게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