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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림 Jun 27. 2021

첫 자사호를 입양해보았다

어린왕자의 여우처럼 매일 차를 우리며 길들이는 숨쉬는 항아리

자사호란 무엇인가? 중국의 의흥宜兴 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나오는 돌덩이를 뽀개 만든 흙으로 만든 찻주전자를 통칭 자사호라고 한다. 유약이 발라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모로 손이 많이 가는 친구라 로망으로 여기면서도 차마 영입하지는 못했었는데 이번에 기어코 했다. 집에서만 생활하다보니 참 별 걸 다 하는 것 같다.

사실 자사호는 어디서 눈탱이맞지 않고 구매하는 것도 초심자에게는 워낙에 큰일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이 글의 자사호 파트에 쓴 바 있다.

나에게는 자사호를 고르는 데 직접적인 노하우가 없어 추천을 받아 타오바오에서 구매하였다. 130ml 주니 추수호이고 무이암차 친구들과 함께할 예정이다. 유약이 없어서 찻물의 향이 차호 안쪽에 배기 때문에, 하나의 자사호에는 한 가지 차만 써야 한다고 한다. 배스킨라빈스 31을 전부 한번씩 찍어먹어야 성에 차는 황희정승적 취향의 나로서는 보통 어려운 친구가 아니다.

진짜 사진보다 실물이랑 찻물 나오는 게 더 예쁜데 내 사진 실력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네

자사호의 분류 기준은 보통 니료 - 어떤 광석을 빻아서 만들었는지와 어떤 모양인지 두 가지가 있다. 공예품 수준으로 창의적으로 만든 건 내가 살 만한 가격은 아니고 보통 전통적인 모양 중 한 가지를 고르게 된다.


자사호의 니료

없는 게 없는 15억 인구의 잡화상점 타오바오에서 자사호 紫砂壶 를 검색하면 나오는 시장에 가장 많이 나온니료들은 다음과 같다. 재료에 따라 궁합이 잘 맞는 종류의 차가 있고, 창의적인 색상의 경우는 이 재료들을 혼합해서 쓰거나 저렴한 제품의 경우엔 별도의 물감을 섞기도 한다고 한다. 찻물에서 서로를 보호하는 유약이 없는 자사호의 특성상 재질이 복잡하지 않은 쪽이 많지 않은 예산으로 안전한 물건을 사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자니 紫泥 - 보라색

주니 朱泥 - 빨간색, 내가 구입한 것

단니 段泥 - 노란색

자사호의 모양

자사호의 모양 역시 아주 창의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사야 아주 비싸거나 이상한 물건을 살 확률이 낮아지는 것 같다. 이것 또한 모양에 따라 궁합이 잘 맞는 종류의 차가 있다고. 나는 정신을 차려보면 그렇게 알라딘 램프처럼 생긴 찻주전자만 골라놓고 있더라.

이것도 타오바오에서 가장 흔한 필터가 뭔가? 찾아보았더니 모바일 뷰에서는 서시(홍차를 우리는 데 유리하다고), 석표, 방고, 이형(서양배모양)을 제시하고 있었다.


자사호의 개호

자사호는 처음 들이면 개호라고 해서 주전자를 세척하고 깨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 포터블 음향기기 커뮤니티에서 유행했던 진동판을 깨운다는 에이징이라는 미신적 과정을 연상케 했다.(지금 생각해보면 이어폰은 공산품인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 자사호는 오는 데 2주가 좀 넘게 걸렸는데 아무생각이 없다가 중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떠나서야 벼락치기처럼 유튜브를 검색해봤다. 일단 길들일 차와 생수와 깨지지 않게 할 수건을 넣고 1시간 넘게 삶았다가 하루종일 담가주는 이 복잡한 과정이 국룰로 자리잡은 듯 했다. 아니 그렇게 할 정도로 더러운건가? 해서 알아보았더니 아무튼 돌가루 재질로 유약을 바르지 않고 오랜 기간 만드는 것이라 노폐물이나 먼지 제거는 필요하다고. 좀 더 편하게 하는 방법이 없나 찾아보다가 결국 국룰을 따르기로 했다. 생수에 차넣고 약불로 1시간쯤 삶은 다음 4시간 정도 담가두었다. 그 뒤 헹구고 완전건조하면 자사호 사용의 1차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삶고나니 좀 더 작아진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결국 소스팬이 찻물땜에 누래져서 베이킹소다 과탄산소다 섞어넣고 한번 더 끓였다

자사호의 양호

최근에 어린 왕자의 경상도 사투리 버전인 '애린 왕자'로 다시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어린 왕자가 여우를 길들이는 방법은 매일 만나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자사호도 그런가 보다. 좋다는 온갖 방법이 있지만(그리고 그 방법들은 하나같이 매우 귀찮아 자사호의 구매 자체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매일 똑같은 종류의 차를 꾸준히 마셔주면, 자사호가 찻물을 머금으면서 그 차를 잘 우릴 수 있게, 또 반짝반짝 예쁘게 길이 든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걸 양호라고 한단다. 그래서 보통 하나의 자사호에는 한 가지 종류의 차만 마신다고 한다. 나는 사실 이 자사호가 예뻐서 샀는데, 이 자사호는 추수호로, 주전자 높이가 납작하지 않고 좀 높은 편으로 입구가 엄청 조그맣다. 내가 가진 차호나 다관류 중에서도 제일 입구가 작은 것 같다. 결국 넣다가 맨날 찻잎을 흘려 결국 차하 사용을 포기했다. 또 니료의 밀도가 높기도 해서, 향 위주로 마시는 우롱차에 적합하다고 한다. 뭐 늘 덕질을 하다보면 예뻐서 산 다음에 기능성을 따지는 것이니까 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다. 상품설명에도 기존에 내가 마시던 것 중에서는 무이암차나 청향우롱에 적합하다고 하여 개호도 대홍포를 조금 넣어서 했었다.

첫날에는 대홍포, 둘째날은 수렴동 육계를 우렸다.
다 마시고도 이렇게 찻물에 4~5시간 담궈두면 자사호를 빨리 길들이는데 유리하다고 이소님이 알려주셨다.(좋다는 건 다 해보는 편)

자사호는 니료나 모양의 특성에 따라 성질이 다 다르고 차맛을 다 다르게 내준다는데, 아무튼 내가 들인 친구는 차 맛의 개성을 깎고 향을 엄청 풍부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었다. 이미 개완으로 마셔봤던 대홍포와 수렴동 육계를 우려보았는데, 청향우롱처럼 향이 풍부해지면서 그윽하게 퍼지게 되는 대신 맛은 좀 밋밋해진다고 해야 하나. 개완으로 마셨을 때의 수렴동 육계는 맛이 굉장히 버라이어티하고 진한 차였는데 여기에 마셨을 때는 대홍포 맛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참고로, 내가 마신 차는 정산당의 샘플러 F에 들어있는 노란 포장의 대홍포와 갈색 포장의 수렴동 육계이다.

자사호에 길들이는 "같은 차"의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차는 지역, 품종, 생산자, 생산시점에 따라 달라지고 이 네 가지를 모두 맞춰야 엄밀하게 "같은 차"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엄밀한 기준을 적용하면 사용 범위가 좁아지고 실용성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사용해보니 자사호가 나같은 둔감한 사람도 바로 알 정도로 차의 맛을 변화시켜주는 건 맞는 것 같은데, 그 변화한 맛이 나의 기호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이론은 있지만, 실제로 해봐야 안다. 종의 특성이라는 게 있지만, 고양이나 개같은 반려동물들도 실제로 길러봐야 내가 반려로 삼은 동물의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돌보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것과도.


이틀간 차를 우려마신 내 자사호는 아직 프린세스 메이커로 따지면 게임 내에서 딸을 키우는 7~8년의 시간 중 3주정도 진행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아니 무슨 비유도...) 그래서 딸의 목표 진로를 바꿔보기로 했다. (아니 무슨 비유를...) 나에게는 오히려 무이암차보다 금준미 같은 정산소종 홍차들이 풍부한 향을 즐기면서 마시는 차였기 때문에 이쪽으로 용도를 변경하기로 했다. 어차피 예뻐서 산거니까 용도야 뭐(....) 같은 느낌으로.

3일째의 금준미. 일단 같은 차의 바운더리를 정산당의 비훈연 정산소종 계열 홍차로 정해보기로 했다.

실제로 마셔보니 암차보다 금준미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향이 더욱 풍부하게 퍼지면서 홍차 특유의 눅진한 맛(금준미야 워낙 싹만 딴 고급 홍차라서 거의 없기도 하지만...)을 좀 깎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일단 금준미같은 비훈연 정산소종 홍차들을 길들여보기로 했다. 내 일정에서 가능한 범위까지 당분간은 아기 고양이를 들였을 때처럼 매일 같은 방법으로 같은 차를 우려보려고 한다. 나의 작고 귀여운 자사호도 언젠가는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반려를 알아주는 날이 올까? 길들이는 세계관은 깊고, 나는 그 세계관에 첫 발을 내딛었다.


요약

자사호는 차의 맛과 향을 변화시켜주는가? -> YES...

변화한 차의 맛과 향이 무조건 더 좋은가? -> NO

자사호는 겁나 손이 많이 가는 도구인가? -> YES...

자사호가 재미있나? YES....

잘 만든 자사호는 사진보다 예쁜가? YES.... (그러나 잘 고르는 게 너무 어려움)

자사호에 관세 낼만한가? YES.....//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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