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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림 Aug 22. 2022

식집사의 첫 고비는 장마철에 온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자생지인 애들은 이때 훅 간다

3월 1일 땡하면서 식물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여 5월까지는 정말 거의 아무런 걱정이 없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물은 언제 주지..? 하는 정도?(사실 그것도 큰 고민이긴 하다.) 오히려 몇몇 식물들은 너무 빨리 덩치가 커져서 걱정이었다. 내가 한 조치라는 것도 작은 화분들이 빛을 더 잘 받게 하기 위해 안 쓰는 컴퓨터 보조책상을 받쳐준 정도였다.


과습으로 처음 꽃다리를 건넌 식물이 생겼다

6월 초중순쯤부터 비가 자주 오고 습도가 높아지는 때가 온다. 보통은 장마라고 하며 한달 좀 안 되게 가는데, 올해 여름은 한철 장마라기보다 여름 전체가 동남아에 있다는 우기에 가까웠다. 내리쬐는 햇볕이 있는 맑은 날을 보름도 채 못 본 것 같다. 베란다 습도가 두달 넘게 평균 80%를 찍는 시간을 보냈다.

두달 내내 대체로 우리집 베란다 온습도는 이런 상태…

당장 뉴질랜드가 자생지라는 마오리소포라와 호주가 자생지라는 왁스플라워가 잎들이 누렇게 뜨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마오리소포라는 3월에 우리집에 올 때도 화분째로 왔으면서 한달이나 잎을 떨구는 몸살을 한 녀석이었다.

3월에 이사몸살을 앓던 마오리소포라

하지만 왁스플라워는 봄에는 가지가 너무 잘 자라서 걱정이었고, 꽃도 무슨 조화마냥 두 달이나 피어있었다.

왁스플라워의 전성기 : 3-5월

그러나 습도가 높아지고 광량은 줄어들자마자 안쪽에 있는 가지부터 하나둘 누런 잎을 내면서 떨어졌다. 3-5월의 폭풍성장으로 실같은 뿌리가 이미 화분을 탈출한 상황이었기에, 통기성이 좋은 토분으로 갈아주었지만 잎을 떨구는 건 멈출 수 없었다. 6월 초 분갈이 이래로 한달간 물을 주지 않았건만 흙은 마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화분을 엎어 흙을 손으로 덜어내고 뿌리 상태를 봤다. 흙이 반쯤 곤죽이 되어 바스라져 내려가는 와중 가장 굵은 뿌리마저 새카맣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는 식물에 대한 경험치가 없던 상태라 이 식물 뿌리는 원래 까만 건가? 아니면 흙이 까매서?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 흙을 담아주고 습도가 좀 더 낮은 실내에 두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2주, 다시 드라이플라워가 되기 시작했다. 흙은 계속 축축했다.

다시 화분을 엎어 가지에 비해 초라한 규모의 검정색 뿌리를 마지막 수단으로 씻어내고 물에 담가주었다. 유튜브 선생님들은 물꽂이가 잘 안되는 종이라고 하였지만 혹시나 하여 가지도 몇개 잘라 물에 넣어보았다. 3주 후에야 이 식물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가 식물을 죽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뿌리가 이정도로 새카매지면 썩은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흙까지 파볼 일이 엔간해서 도시인에게는 없는 탓일 테다.

이전에도 간헐적으로 식물을 많이 죽였지만, 대개 식물의 존재를 잊고 적극적으로 돌보지 않았기 않았기에 죽었다. 하지만 매일 상태를 살피던 식물이 불가항력으로 죽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마음에 조금은 타격이 있었다. 그때부터 자생지에 따른 식물의 특성이나 잘 살 수 있는 환경에 대해 공부하고 때로는 실내에서 온습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기를 태워도 늦봄-초여름의 햇살과 약간 건조한 듯한 습도를 사계절 만들어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유칼립투스나 아카시아, 티트리… 뭔가 특이하면서 잎사귀가 작고 하늘하늘하고 예쁜 식물은 어김없이 그렇다. 그래서 이런 식물들은 앞으로 또 들이게 되어도 습도가 높고 광량이 부족한 장마철을 넘기기 쉽진 않을 것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기후변화로, 더이상 장마철이 한철이 아닐 가능성도 높아졌다. 사계절국에서 특정 계절을 너무 좋아하는 식물이라면, 다음 계절에는 지옥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장마철 내내 시름시름하며 잎을 떨구다가 고비를 넘기고 새순을 내기 시작한 병약한 마오리씨…

게다가 7월 말에는 둥근잎 아카시아에 큰 규모의 병해충마저 만나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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