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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림 Aug 29. 2022

장마철을 사랑하는 칼라데아를 사랑한 죄

결국 온실까지 만들어야 했다

식물을 하나 둘 사모으다 보면, 취향이라는 게 생긴다. 습도가 여마어마했던 올 여름은 여리여리한 호주식물들이 훅 가버리기도 했지만, 칼라데아와 사랑에 빠진 계절이기도 하다. 어둡고 습해서 인간조차 기분나쁜 이런 환경을 좋아하는 건 너희들이 처음이야!


이 집으로 이사온 지 3년이 되었다. 아주 많은 돈을 들이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집은 트레이드 오프라는 것이 있다. 비슷한 가격에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게 되는 것이다. 더 가까운 지하철역과 넓어진 거실, 사라진 도로 소음 대신 채광을 잃었다. 베란다 월동도 되고 제라늄과 다육이를 키웠어도 될 집에서 출퇴근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7년을 보냈다. 어차피 출퇴근만 할 집이니, 이번에는 반려인이 희망하는 거주 조건을 맞추기로 했다. 그런데 그 해 말에 전세계적인 전염병이 찾아왔고, 그와 별개로 나도 건강을 잃었다. 이 집에서 하루종일 집안에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채광을 잃는다는 것은 실내에서 시간의 구분이 어렵게도 되고, 인간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냉난방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겨울철 창을 열지 않으면 결로가 와서 앞베란다는 빨래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거나, 빨래를 말리는 일 말고는 하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원래도 뭔가에 애착이나 소속감이 옅은 타입이지만 이 집으로 올 때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도 있어서인지 이 공간을 좋아하긴 어려웠던 것 같다. 한여름에도 정오가 지나면 거실에도 형광등을 켜야 하는 점이 특히 힘들었다. 투덜대고 있자면 이사갈까? 묻기도 하지만 이사를 또 하다가는 정말 힘들어서 죽을 지도 모른다. 집이 삭막하지 않냐며 식물이라도 키워보자고 했던 건 오히려 반려인이었는데, 내가 싫다고 했다. 일단 뭔가를 돌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사람이 우울할 정도로 어두운 집은 식물도 거절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이 이런 사람이었기에

90%에 육박하는 습도에 아카시아와 마오리소포라가 몸을 비틀 때, 홀로 반짝이는 식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칼라데아 퓨전화이트.

칼라데아 퓨전화이트

아름다운 무늬로 식덕 입문 화초 겸 (해충)응애밥으로 유명한 친구인데, 놀랍게도 응애는 아카시아만 맛있게 잡수셨더라는. 식물 맛은 호주산이 최고인 것입니까…. 아카시아는 병충해 안생긴대서 큰 걸 사고, 오히려 이쪽을 응애밥에 키우기도 어렵다지만 그래도 예쁘니까 만 원이라면 사볼까, 하고 들여온 것이다. 해충들도 나름 입맛이 있나보다. 비싼 딸기가 있으면 떫은 감에는 손이 잘 안 가는 것처럼 말이다. 칼라데아가 예쁘지만 어렵다고? 어차피 제일 까다롭다는 친구가 우리집에서 잘 지낼 정도면 이것저것 알아봐도 괜찮겠지. 게다가 나에게는 응애약이 남아있으니 사전방제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농약 사오는 길에 서울식물원에서 봤던 진저부터 데려왔다. 핑크색 볼펜 줄이 너무 귀여워!!! 서 크레이지 가드너를 볼 때부터 찜해두었던 식물. 비슷한 것으로 오나타가 있는데, 오나타는 잎모양이 좀 더 빵떡하고 색이 진하면서 선 색은 연핑크다. 진저는 길쭉하고 색이 옅으면서 선 색은 진핑크. 오나타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길쭉한 진저가 좋다.

칼라데아 진저

서울식물원에서도 잎이 탄다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진저 선생님이 우리집에서 보송하게 잘 살고 있다…? 이게 무슨일…? 하며 칼라데아 중 가장 까탈넘친다는 오르비폴리아를 인터넷으로 구매했다.(이것이 내 생애 첫 식물 인터넷 구매였다)

그… 선생님은 어쩌다가 살판이 나셨는지요…

이파리를 새로 돌돌말아 올리는 게 너무 귀여워!!! 이때부터 폭주하기 시작해 온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막 사댔다. 심지어 식덕들이 많이 산다는 그런 희귀식물들처럼 비싼 것도 아니야! 비싸봐야 만 원이야!!! 신난다!!!

어두우면 빨딱 섰다가 해가 나면 쭉 펴는 스트로만테 멀티칼라. 사실 마란타과 식물들의 공통된 속성이라고.
까탈대왕이라고 유명한 로제오픽타 로시. 토분이 마르기 전에 흙이 마르는 녀석은 니가 처음이야….
스트로만테 그레이스타. 회색 잎에 생선뼈 무늬가 예쁘게 어울린다. 비슷하게 생긴 크테난테 아마그리스가 좀더 흔하지만 오나타-진저처럼 빵떡이보다는 길쭉한 게 좀 더 취향이다.
칼라데아 무사이카 네트워크. 이건 완전 it 인간을 위한 픽셀무늬…(집어쳐)
드루이드 친구가 준 그린 마란타.

그리하여 신나게 우리집을 좋아하는 마란타과의 마란타속-칼라데아속-스트로만테속 친구들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버렸다.(신기하게도 유통명은 전부 칼라데아로 통일되어 있다.) 일단 밝을 때는 잎이 누웠다가 해가 지면 이파리가 발딱 서는 것부터가 너무 귀엽고, 새 잎이 돌돌 말린 종잇장처럼 나는 것도 너무 귀엽다. 무엇보다 무늬가 너무 누군가가 슥슥 그린 것처럼 사랑스럽다.

칼라데아 친구들의 잎 사진과 일러스트

하지만 호주 식물들이 좋아하는 3-5월까지의 시기가 영원하지 않으며 다음 계절은 죽음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듯 우리집에 있는 8종의 칼라데아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예상해 볼 수 있다. 칼라데아들은 온도가 낮고 습도가 낮은 환경을 견디지 못해 타들어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냥 냅두다가는 9월도 끝나기 전에 오호츠크 돌고래..  아니라 칼라데아 떼죽음을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연쇄 살식마가 되는 거지….


그러기 전에 온실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인간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니까. 예쁜 아이들이 한 계절이라도 우리집을 사랑해준다면, 나머지 계절은 내가 지켜줄게…! 같은 건 농담이고, 인공 광량은 양지식물에는 맞추기 어려워도 음지식물에는 맞춰줄 수 있고, 통풍 잘 되는 공간에 제습은 어려워도 밀폐하면 높은 습도는 맞춰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싼데, 설비가 더 비싸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만 높은 습도를 요구하는 식물을 사랑한 죄라고나 할까.


게다가 모든 식물이 온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13도 이하가 되면 냉해를 입기도 하는 연약한 친구들이기도 하므로 월동가습 대책도 잘 세워둬야 하겠다. 그래서 겨울을 준비하는 개미의 입장으로 희귀식물도 아닌 이 친구들이 죽지 않기 위해 끙끙대는 며칠을 보내고 있다. 나도 식물과 함께하는 가을/겨울은 처음 맞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친구들이 잘 자라는 집이라면 어쩌면 나도 조금 좋아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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