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온실까지 만들어야 했다
식물을 하나 둘 사모으다 보면, 취향이라는 게 생긴다. 습도가 여마어마했던 올 여름은 여리여리한 호주식물들이 훅 가버리기도 했지만, 칼라데아와 사랑에 빠진 계절이기도 하다. 어둡고 습해서 인간조차 기분나쁜 이런 환경을 좋아하는 건 너희들이 처음이야!
이 집으로 이사온 지 3년이 되었다. 아주 많은 돈을 들이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집은 트레이드 오프라는 것이 있다. 비슷한 가격에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게 되는 것이다. 더 가까운 지하철역과 넓어진 거실, 사라진 도로 소음 대신 채광을 잃었다. 베란다 월동도 되고 제라늄과 다육이를 키웠어도 될 집에서 출퇴근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7년을 보냈다. 어차피 출퇴근만 할 집이니, 이번에는 반려인이 희망하는 거주 조건을 맞추기로 했다. 그런데 그 해 말에 전세계적인 전염병이 찾아왔고, 그와 별개로 나도 건강을 잃었다. 이 집에서 하루종일 집안에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채광을 잃는다는 것은 실내에서 시간의 구분이 어렵게도 되고, 인간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냉난방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겨울철 창을 열지 않으면 결로가 와서 앞베란다는 빨래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거나, 빨래를 말리는 일 말고는 하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원래도 뭔가에 애착이나 소속감이 옅은 타입이지만 이 집으로 올 때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도 있어서인지 이 공간을 좋아하긴 어려웠던 것 같다. 한여름에도 정오가 지나면 거실에도 형광등을 켜야 하는 점이 특히 힘들었다. 투덜대고 있자면 이사갈까? 묻기도 하지만 이사를 또 하다가는 정말 힘들어서 죽을 지도 모른다. 집이 삭막하지 않냐며 식물이라도 키워보자고 했던 건 오히려 반려인이었는데, 내가 싫다고 했다. 일단 뭔가를 돌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사람이 우울할 정도로 어두운 집은 식물도 거절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90%에 육박하는 습도에 아카시아와 마오리소포라가 몸을 비틀 때, 홀로 반짝이는 식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칼라데아 퓨전화이트.
아름다운 무늬로 식덕 입문 화초 겸 (해충)응애밥으로 유명한 친구인데, 놀랍게도 응애는 아카시아만 맛있게 잡수셨더라는. 식물 맛은 호주산이 최고인 것입니까…. 아카시아는 병충해 안생긴대서 큰 걸 사고, 오히려 이쪽을 응애밥에 키우기도 어렵다지만 그래도 예쁘니까 만 원이라면 사볼까, 하고 들여온 것이다. 해충들도 나름 입맛이 있나보다. 비싼 딸기가 있으면 떫은 감에는 손이 잘 안 가는 것처럼 말이다. 칼라데아가 예쁘지만 어렵다고? 어차피 제일 까다롭다는 친구가 우리집에서 잘 지낼 정도면 이것저것 알아봐도 괜찮겠지. 게다가 나에게는 응애약이 남아있으니 사전방제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농약 사오는 길에 서울식물원에서 봤던 진저부터 데려왔다. 핑크색 볼펜 줄이 너무 귀여워!!! 서 크레이지 가드너를 볼 때부터 찜해두었던 식물. 비슷한 것으로 오나타가 있는데, 오나타는 잎모양이 좀 더 빵떡하고 색이 진하면서 선 색은 연핑크다. 진저는 길쭉하고 색이 옅으면서 선 색은 진핑크. 오나타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길쭉한 진저가 좋다.
서울식물원에서도 잎이 탄다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진저 선생님이 우리집에서 보송하게 잘 살고 있다…? 이게 무슨일…? 하며 칼라데아 중 가장 까탈넘친다는 오르비폴리아를 인터넷으로 구매했다.(이것이 내 생애 첫 식물 인터넷 구매였다)
이파리를 새로 돌돌말아 올리는 게 너무 귀여워!!! 이때부터 폭주하기 시작해 온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막 사댔다. 심지어 식덕들이 많이 산다는 그런 희귀식물들처럼 비싼 것도 아니야! 비싸봐야 만 원이야!!! 신난다!!!
그리하여 신나게 우리집을 좋아하는 마란타과의 마란타속-칼라데아속-스트로만테속 친구들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버렸다.(신기하게도 유통명은 전부 칼라데아로 통일되어 있다.) 일단 밝을 때는 잎이 누웠다가 해가 지면 이파리가 발딱 서는 것부터가 너무 귀엽고, 새 잎이 돌돌 말린 종잇장처럼 나는 것도 너무 귀엽다. 무엇보다 무늬가 너무 누군가가 슥슥 그린 것처럼 사랑스럽다.
하지만 호주 식물들이 좋아하는 3-5월까지의 시기가 영원하지 않으며 다음 계절은 죽음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듯 우리집에 있는 8종의 칼라데아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예상해 볼 수 있다. 칼라데아들은 온도가 낮고 습도가 낮은 환경을 견디지 못해 타들어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냥 냅두다가는 9월도 끝나기 전에 오호츠크 돌고래.. 가 아니라 칼라데아 떼죽음을 볼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연쇄 살식마가 되는 거지….
그러기 전에 온실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인간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니까. 예쁜 아이들이 한 계절이라도 우리집을 사랑해준다면, 나머지 계절은 내가 지켜줄게…! 같은 건 농담이고, 인공 광량은 양지식물에는 맞추기 어려워도 음지식물에는 맞춰줄 수 있고, 통풍 잘 되는 공간에 제습은 어려워도 밀폐하면 높은 습도는 맞춰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싼데, 설비가 더 비싸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만 높은 습도를 요구하는 식물을 사랑한 죄라고나 할까.
게다가 모든 식물이 온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13도 이하가 되면 냉해를 입기도 하는 연약한 친구들이기도 하므로 월동가습 대책도 잘 세워둬야 하겠다. 그래서 겨울을 준비하는 개미의 입장으로 희귀식물도 아닌 이 친구들이 죽지 않기 위해 끙끙대는 며칠을 보내고 있다. 나도 식물과 함께하는 가을/겨울은 처음 맞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친구들이 잘 자라는 집이라면 어쩌면 나도 조금 좋아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