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된 믿음, 경영 컨설턴트의 퇴사
주말을 앞둔 평화로운 금요일 오후입니다. 몇 주째 골치를 아프게 하던 문제를 가까스로 해결해서 오랜만에 홀가로운 기분입니다. 다들 여유로움을 들키지 않으려 숨기며 은밀한 퇴근 준비에 분주합니다. 퇴근 시간은 항상 중요하지만 금요일에는 배가됩니다. 몇 분 늦게 퇴근한 결과가 몇 십 분의 도착 시간을 좌우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주말을 앞두고 어지러이 얽혀있는 도심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서둘러 움직여야 합니다.
너무 티 나지 않게 이른 최적의 타이밍을 잡는 것이 관건입니다. 체면과 실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심하고 막 일어나려는 순간, 저의 자리로 다가오는 팀원 한 명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정된 일이 아니었기에 무슨 일인지 의아합니다. 타이밍도 뜬금없지만 평소에 좀처럼 먼저 오지 않았던 팀원이기에 더욱 이상한 느낌입니다. 조심스럽게 자리에 다가온 팀원이 말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아뿔싸!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다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뻔히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평소 같으면 "안됩니다. 돌아가 주세요. 듣지 않을 겁니다!"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긴장을 풀기도 했지만 오늘은 그럴만한 여유도 없고 기분도 나지 않습니다. 조용한 회의실에 단 둘이 앉자마자 팀원이 말을 꺼냅니다. "퇴사를 하려 합니다." 뻔히 예상한 상황이건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힘이 빠집니다. 고객사와 인력 교체를 논의하고, 새로운 컨설턴트로 바꿔야 합니다. 고객사의 프로젝트 담당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번거로운 행정절차는 덤입니다.
컨설팅사의 근속 연수는 일반 기업보다 훨씬 짧습니다. 요즘은 일반 기업도 짧아지는 추세이지만 아직은 컨설팅사와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차이가 큽니다.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습니다만 저의 경험상 컨설팅사의 평균 근속 연수는 2~3년에 불과합니다. 연간 이직률로 따지면 20% 내외이니 5~6년이 지나면 대부분의 컨설턴트가 회사를 나간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엉덩이가 무거워서 잘 움직이지 않는 컨설턴트도 있지만 대부분은 더 나은 기회, 더 나은 처우를 찾아서 자유롭게 떠납니다.
다양하고 빠른 전직의 기회는 컨설턴트가 누릴 있는 장점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능력만 된다면 이직할 수 있는 컨설팅사가 무궁무진합니다. 사고를 친 경우가 아닌 이상, 경력직 컨설턴트는 어디서나 환영받는 존재입니다. 노트북 한 자루만 쥐어주면 바로 프로젝트 수행이 가능한 즉시 전력감입니다. 굳이 한 곳에서 뼈를 묻겠다는 각오를 말했다가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고, 기대하지 도 않는 헛된 다짐일 뿐입니다. 능력을 인정받으면 연봉을 높이거나 빠르게 승진하든지, 더 좋은 조건과 자리를 제시하는 타사로 전직하면 됩니다.
동료 컨설턴트의 전직은 남아 있는 컨설턴트에게도 득이 되는 일입니다. 물론 빈자리를 누군가 메꾸어야 하기에 단기적으로는 업무 부담이 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맥이 중요한 이 바닥에서 곳곳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절친 몇몇 보다는 아는 사람 여럿이 훨씬 힘이 됩니다. 이는 컨설팅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컨설팅사는 동문 네트워크(alumni network)를 운영합니다. 컨설팅사는 퇴직 컨설턴트에게 가끔씩 소식을 보내며 느슨한 인연을 유지합니다. 퇴직한 컨설턴트가 과거에 몸담은 컨설팅사의 고객이 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입니다.
컨설턴트의 퇴사는 또 다른 컨설팅사의 설립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아더 디 리틀에서의 파트너 간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브루스 헨더슨은 보스턴 컨설팅 그룹을 설립했습니다. 브루스 헨더슨이 영입해서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서 가장 잘 나가던 빌 베인이 뛰쳐나와서 설립한 컨설팅사가 베인 앤드 컴퍼니입니다. 베인 앤드 컴퍼니출신의 컨설턴트가 파르테논을 설립했으며, 파르테논은 언스트앤드영에 인수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가계도가 아닌 단발적인 창업 사례는 더욱 많습니다. 보스턴 컨설팅에서 뛰쳐나온 롤랜드 버거, 맥킨지와 브랜드를 같이 쓰다가 분가한 에이티커니, 부즈앨런해밀턴 출신의 컨설턴트가 설립한 올리버 와이만, 베인 앤드 컴퍼니 출신의 컨설턴트 세 명이 설립한 L.E.K 컨설팅 등은 대표적이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중소 컨설팅사의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요즘은 컨설턴트의 창업이 컨설팅 바깥을 향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쿠팡, 마켓컬리, 티몬, 리멤버 등이 컨설턴트 출신이 창업한 회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접 창업을 하지 않더라도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하는 경우도 크게 늘었습니다. 지금은 투자 시장이 얼어붙어서 줄어들었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상당수의 후배 컨설턴트들이 새로운 꿈을 찾아서 시리즈 A와 B 사이의 스타트업을 향했습니다.
또 다른 컨설팅사로 전직을 하든지, 직접 컨설팅사를 차리든지, 컬설팅을 벗어나 새로운 업종에 도전을 하든지 간에 회사 밖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회사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퇴사하는 컨설턴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들이 가진 불만족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의외로 물질적인 보상 수준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안정감도 큰 몫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쩌면 돈문제를 이야기하기 껄끄러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컨설턴트의 퇴사의 변으로 정서적인 안정감의 결핍을 꼽았고, 외부와 자신에 대한 두 가지 믿음이 흔들렸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외부의 상황에 대한 믿음입니다. 회사와 팀이 바라보는 방향과 달성 방법에 대한 신뢰, 리더를 하는 인간에 대한 신뢰, 내 옆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내가 있을만한 곳에 있구나”하는 안도감이 듭니다. 작년과 같은 전략으로 올해는 달라질 거라는 공염불, 자신이 한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고 반대로 행동하는 리더, 팀의 에이스들이 줄줄이 짐을 싸는 환경에서 만족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는 나의 지향에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 일을 잘 해내고 있음을 실감하고 그 과정과 결과에서 보람과 만족감을 느낀다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구나”하는 안도감이 듭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할만한 일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해낸 것인지도 모르며, 머리를 비우고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상황이라면 안정감을 느끼기란 불가능합니다.
더 큰 문제는 믿음은 유리처럼 비가역적이라서 깨어진 믿음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한 번이라도 배신의 기분을 느껴보신 분들이라면 공감할 겁니다. 배신자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행동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솟아나기 마련입니다. 금이 간 유리처럼 상처받은 믿음은 더욱 쉽게 바스러지고 깨지기 마련입니다. 다들 아는 내용일 텐데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쉽기만 합니다.
부디 믿음이 충만한 컨설팅사에서 일할 수 있기를!
이 글은 <거의 모든 컨설팅의 역사>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을 추가하거나, 저자의 감상을 적는 시리즈물의 일환입니다. 시리즈물의 취지와 <거의 모든 컨설팅의 역사>의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이 글과 관련된 <거의 모든 컨설팅의 역사>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963년 | 전략을 팝니다, 『보스턴컨설팅그룹』
1973년 | 분가한 블루팀, 『베인앤드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