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흉내 내지 않는 게 좋았다
생과 사의 우로보로스
- 김용기
봄이 내렸다
바람이 불었지만
힘 빠져
겨울 흉내가 힘 들었던 것인지
가다가 서고
다시 열 발자국 가다가
나뭇가지 하나 쥐고 흔들었지만
겨우 제비꽃 하나 살랑거렸다
완벽한 무시였다
떠날 때는
물린 개처럼 꼬리 내리고 슬그머니
없는 듯 가는 게 법
지난겨울이 그랬고
서슬 퍼렇던 군사권력이 그랬고
내 안 태산 같은 걱정이 그랬는데
언 땅 뚫었던 봄이
흐드러졌던 봄이
어디 갔나 했더니
수채구멍에 들어 가 있었다
봄이 내리더니
봄이 내렸고
봄비 뛰어내린 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 걸 알았다
정 뗄 틈 없이 갔다
서로
변심 탓할 처지는 아니었으므로
슬그머니 반팔로 갈아입었다
굵은 꽃잎 하나 떨어졌을 때
친구의 장례식은 삼일 만에 끝났고
그의 자녀들은 우람하였다
봄이 겨울을 먹었고
봄이 여름에게 먹힌다는 것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줄 선 문상객들에게 슬픔은
한 번 삼키는 예의에 불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