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출근하는 학원장은 아이를 등교 시킨 후,
아침 시간에 집안일을 몰아서 해야 한다.
그날도 설거지를 마치고 다용도실에서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빨랫감을 분류해 세탁기에 넣고,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은 뒤
동작 버튼을 누르고 호기롭게 다용도실 문을 나서려는데
-뭔가 이상하다.
문이… 잠겼다…
우리 집 다용도실 문은 밖에서 잠글 수 있는 구조다.
아마 아이가 장난을 치다 문을 잠갔거나
내가 무심코 돌려 잠근 것 같다.
큰일이다.
빨래를 돌리러 다용도실에 갈 때 휴대폰을 챙겼을 리 없다.
게다가 그때는 한겨울.
얇은 홈웨어만 입은 채,
가족들이 돌아오는 저녁까지 버틴다는 건 불가능하다.
오후부터는 수업도 있다.
이대로 갇혀 있으면 나는 연락도 없이 결강하는 무책임한 원장이 될 것이며,
심하면 내일 아침 신문 사회면에 실릴지도 모른다.
“영하의 날씨, 반팔 차림으로 다용도실에서 동사한 40대 여인…”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다.
침착하자. 빠져 나가야 한다.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도무지 침착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빨래 건조기 위로 오른다.
며칠 전 넘어져 꿰맨 무릎이 욱신거리지만, 아픔을 참고 기어오른다.
“도와주세요!”
마치 무인도에서SOS를 외치듯, 목소리를 쥐어짜 처절하게 외친다.
하지만 창 밖엔 아무도 없다.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젊은 엄마들에게까지 내 목소리가 닿기엔 너무 멀다.
일단 후퇴.
누군가 지나가길 기다린다.
시계도 없으니, 몇 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재활용 쓰레기장에 일용직 아저씨 한 분이 보인다.
기회다!
“도와주세요! 다용도실 문이 잠겼어요!”
올려다본 아저씨의 한 마디.
너무도 사무적인 표정으로,
“관리사무소에 연락하세요.”
“휴대폰이 없어요. 그럼 관리사무소에 연락 좀 부탁 드려요!”
….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 하는 건지 그 아저씨는 유유히 사라진다.
내 남은 인류애마저 바사삭.
다시 기다린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동 앞으로 유모차를 끌고 나타난 아기 엄마.
“도와주세요!”
눈이 마주친 아기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
나는 간절히 설명한다.
“다용도실에 갇혔어요….
집 비밀번호 알려드릴 테니 좀 도와주세요.”
말을 하다 눈물이 터진다.
“잠시만요!”
나 같으면 무서워 도망쳤을지도 모르는데, 그 아기 엄마는 참 따뜻하게 움직여주었다.
드디어 우리 집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들리는 “띠띠띠띠-”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스르르 다리에 힘이 풀린다.
‘철컥’
열렸다
다용도실 문과 함께
내 마음 속 빗장도 열렸다.
인류애가 사라졌다는 말, 취소다.
아직 세상은 살만 하다.
내가 우니,
엄마에게 안겨있던 아기도 따라 운다.
울음이 멈추고 난 뒤엔, 어색한 침묵.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라도 드리고 싶은데… 이거 드세요!”
펜트리로 달려가 초콜릿 한 상자를 꺼내 쥐여준다.
“안 주셔도 돼요! 괜찮으세요?정말…”
그제야 깨달았다.
늘어난 홈웨어, 씻지도 않은 산발 머리의 내 꼴.
아기가 울 만도 하다.
“감사합니다….정말 감사합니다.”
아기 엄마는 문을 나서며 한 마디 덧붙인다.
“비밀번호를 너무 크게 외치셨어요, 번호부터 바꾸세요.”
사람 좋은 미소를 남기고 퇴장.
그리고,
그날 나의 일상도 다시 돌아왔다.
그날 이후 나는 다용도실에 들어가기 전 문고리를 몇 번이고 돌려보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리 춥고 불편해도, 다용도실 문 만큼은 활짝 열어놓고 빨래를 돌린다.
다시는 갇히면 안되니까.
그날의 갇힘은 그저 웃픈 에피소드였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나도 모르게 닫아둔 내 마음의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소심한 다짐도 하나 생겼다.
“다음엔, 누군가의 다용도실 창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내가 들어주자.”
그날, 나는 누군가의'도와주세요'를 절대 흘려듣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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