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관조한다면

독서는 다독보다 숙독이 더 중요하고, 글은 자기 자신을 위해 써야만 한다

by 장코코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교양'을 꼽았다. 그는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가 가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행복은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냐 하는 것보다는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끝없는 의욕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인생에 대한 지적 관조와 독서를 통한 위대한 사상가와의 대화다. 철학자는 사물을 지적인 대상으로 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갇혀 왜곡된 시각으로 본다. 쇼펜하우어는 사유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으로 독서를 권했다. 그는 "먹는 것이 육체가 되고, 읽는 것이 정신이 되어 현재의 자신이 된다."라고 말한다.


철학적으로 향유하려면 사고하는 근육을 키워야 한다. 그런데 독자적인 사유에 필요한 독서의 방향이 다르면 이득보다 해악이 많다. 쇼펜하우어는 독서의 장점과 단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생각이 부족한 상태에서 남이 쓴 책을 읽는 것은 위험하다. 남의 글을 읽으면서 남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걸어간 사유의 길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편안함으로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면 자신이 사유하는 공간은 점점 사라진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가 권하는 독서법을 귀 기울여야만 한다. 그는 "첫째, 고전을 읽을 것을 권한다. 둘째, 두 번 읽을 것을 권한다. 셋째, 악서를 피하라."라고 조언한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의견은 다독보다는 숙독과 정독을 더 요구한다. 요즘 여기저기 독서 클럽이 많은데, 자칫하면 숙독보다는 다독에 집중하고 팀원들과의 약속에 쫓겨서 거짓으로 책을 허겁지겁 대충 읽을 수 있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독서 글럽을 운영해야만 올바른 성과가 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2천 권을 읽었다. 혹은 3천 권을 읽었다."라고 말하는 주장과 다독을 한다는 주장을 대부분 믿지 않는다. 그런 주장은 별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한 예로 독서 모임을 주관하기도 하면서 방송에 자주 출현하는 한 국내 작가는, 글 실력이 정말 형편없다. 그가 쓴 소설을 읽고 있다가 화가 치밀어서 책을 그대로 덮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 작가가 거짓으로 책을 읽을 가능성도 있고, 또한 책을 쓰기 위한 사색의 시간이 적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쇼펜하우어가 조언한 대로 올바로 독서를 했다면 절대로 그런 부족한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도 읽다 보면 실로 한심하고 답답하다고 느끼는데, 하루키를 모방한다는 그의 작품은 읽어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정말 엉성하다. 그 작가의 글 실력이 형편없는 것은 올바른 독서를 안 하고, 혼자서 깊이 사색하고 사유하는 시간이 부족한 이유라고 나는 판단한다.


현대에는 실로 악서로 넘쳐난다. 출간 작가들의 책이나 좀 유명한 작가들의 책에서 읽어나가기가 괴로운 악서들이 많다. 이런 악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고전에 집중하고 좋은 책을 골라서 읽는 습관을 만들어야만 한다. 즉 악서를 피하는 자기만의 독서 철학도 반드시 필요하다.


쓰는 이와 읽는 이의 관계를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비유했다. "책에만 매달리는 평범한 철학자와 스스로 사고하는 사람의 관계는 역사 연구가와 목격자의 관계와 같다.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사물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파악한 것을 말한다."


아무리 많은 지식도 숙고한 지식만큼의 가치는 없다. 쇼펜하우어의 조언을 숙고해 본다면 많은 독서는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데 방해가 된다. 많이 읽을수록 자기 스스로 사고하는 힘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는 것과 남이 입다 버린 옷을 입는 사람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한다.


독서를 해서 오히려 남의 생각에 끌려다니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사고의 샘이 막혀 버렸을 때만 독서를 해야 한다. 독서보다 독자적 사고가 월씬 더 가치가 있다. 독자적인 사고 없이 남이 쓴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사유 없는 다독을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생각을 영글게 하는 건 다독이 아니라 숙독이며, 독서를 통해 받아들인 타인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랜 사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너무 많이 먹으면 영양 과잉이 되듯이 책을 많이 읽을수록 독자적인 사고가 줄어들 수 있다. 되새김이 전혀 없다면 남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과 같다. 더구나 좋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쉽게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생각하면서 절제하는 가치 있는 독서법이 필요하다.


"책으로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길을 걸으며 무엇을 보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눈으로 봐야만 한다."


문체는 정신의 관상이다. "인간의 생각은 많은 경우 깊이가 없고 단순하며 긴 실을 자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사색은 좋은 문장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다. 스스로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독자적인 사유를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문체다.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너무 허세를 부리는 문체를 쓰지 않는다. 문체에 고유한 독자성이 있고 자연스러우며 소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글을 쓰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 반대로 중요한 사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훌륭한 저술가는 무미건조한 주제마저도 재미있고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와 표현력이다. 진정한 학자에게 학문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탁월한 작품을 얻기 위해 타인의 인식에 신경 쓰지 않고 연구의 직접 목적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얻는 자만이 새롭고 위대한 통찰을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방식은, 그럴듯하게 보여 주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우리가 글을 쓸 때 피해야 할 저술가는 순전히 수익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불명확한 글로 보여준다. 문체에 단호함과 명확함과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 반면에 가치 있는 생각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달하려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사물 자체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한다. 오직 '사물 자체'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만이 쓸 가치가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대한 사상가가 쓴 고전의 가치가 다시 강조된다. 천재는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고 "사물의 전체와 위대함, 본질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자기 업적의 주제로 사는 자이다." 오늘날 쇼펜하우어와 같은 글쓰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좋은 글의 조건과 방향성에 대하여 공감할 부분이 많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윤보다는 사물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반면에 앞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피를 쏟아서 쓴 것만 사랑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피는 정신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냥 정신만으로는 부족하다. 땀과 눈물이 합쳐진, 온몸으로 쓴 생명의 산물이어야 한다. 니체는 전통적인 서구 종교와 도덕 철학에 깔려 있는 근본 동기를 밝히기 위해 그렇게 피를 쏟아서 쓰고 또 썼다.


우리가 니체의 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보통 말을 듣거나 읽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읽고 거기서 무언가를 인용해 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 몇 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니체는 이것을 독서하는 게으름뱅이들의 전형적인 행태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누가 어떤 책을 읽고, 외우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니 그냥 알고 넘어가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크게 화를 냈다.


진짜 교양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책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가, 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얼마나 많이 그리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가, 나는 바로 여기에 교양인이냐 아니냐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시인 '두보'는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고서도 자기 삶에 제대로 적용할 할 수 없는 사람은 에너지를 쓸데없이 낭비한 것뿐이다. 물론 여기서 남자는 남자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남녀 전체를 가리킨다.


니체는 단지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현명해질 수 없다며, 책을 통한 지식을 직접 체험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다방면에서의 다양한 체험이 사람을 한층 현명하게 만든다. 따라서 살면서 체험하는 모든 일들이 유익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무엇인가 체험하고 있을 때는 완전히 몰두해야 한다. 중도에 체험하는 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그러면 전체를 마음껏 차분하게 집중할 수 없다. 반성이나 관찰은 그 뒤에 오는 것으로, 이때 비로소 새로운 지혜가 생산되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를 촌철살인의 짧은 글로 구성하는 걸 좋아했는데, 이는 진리의 핵심을 꿰뚫는 짧은 글이 한 권의 책과 대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포리즘이나 금언, 속담 같은 말들은 인간의 지혜를 짧게 엮어 외우기 쉽게 만듦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 니체는 어쩌면 자신의 아포리즘들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인생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작품을 단순히 그냥 한 번 읽히고 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책을 쓸 때 피를 쏟아서 썼기에, 니체 역시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가 그 내용 하나하나를 완전히 체화하여 삶의 영양분으로 삼기를 바랄 것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 이후에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자신의 철학적 글쓰기 방식으로 아포리즘 형식을 선택했다. '도덕의 계보, 비극의 탄생, 반 시대적 고찰' 등은 예외로 논문 형식을 취했다. '아포리즘 Aporism)이란 잠언이나 경구, 격언을 의미하며, 자신이 체험으로 깊이 깨달은 진리를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자신이 아포리즘을 쓰는 것과는 관련해서는 독일인 가운데 최초의 대가라고 자칭한다.


니체가 아포리즘이라는 표현 형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니체는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짧고 간결한 방식의 아포리즘 문체로 글을 쓸 수박에 없었다. 또한 숲 속을 산책하는 도중에 떠오른 생각들을 급히 적었기 때문에 아포리즘 형식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니체는 글을 중언부언 길고 어렵게 쓰지 말라고 했다. 좋은 글이란 간결하면서도 많은 내용을 함축하는 짧은 글을 의미한다. 그의 야심은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 말하는 것 또는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열 개의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세 번째, 니체는 자신의 글이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독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 다양하게 해석하기를 바랐다. 아포리즘은 독자가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니체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하게 그리고 점점 더 훌륭하게 글 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니체가 말한 글을 보다 훌륭하게 쓴다는 것은 더 훌륭하게 사색하라는 것이다. 결국 글을 훌륭하게 쓴다는 것은 훌륭한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혈관 속에 녹아든 삶의 지혜를 표현하자. 그것이 곧 살아 숨 쉬는 글이다.



(참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곁에 두고 읽는 니체, 마흔에 읽는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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