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에 가치 있는 의미를 더 하려면
지금까지 몇 편에 걸쳐서 위대한 철학자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우리에게 남긴 고귀한 조언들을 브런치 스토리에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과 구독자들이 관심을 갖는 내용이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이들 철학자들이 정말로 강조하고 싶었던 더 귀중한 글귀와 내가 탄성을 지르던 글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구독자들이 관심을 갖는 글귀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삶에서 각자 관심을 갖는 내용에 더 집중하게 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겠다.
쇼펜하우어는 니체가 철학자의 길로 나가게 한 길목을 열어준 사람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한창 고민하던 니체에게, 니체가 살던 1층에 집주인이 하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철학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위대한 철학자로 인류에게 공헌하게 된다. 니체 같은 이런 결정적인 과정이 인간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두 분의 철학자에게 푹 빠져 지내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은, 나의 지나온 삶의 궤적을 다시 돌아보면서 이 분들을 좀 더 빨리 만났으면 내 인생도 바뀔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하지만 이분들이 그토록 애쓰던 고뇌와 사색의 시간이 지금 나에게도 같은 시간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가슴도 벅차오르고 뭉클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뜻밖에 나에게 이런 중요한 시간을 준 분들은 사실상 따로 있었다. 내가 몇 년 전에도 키에르 케고르와 에리히 프롬과 막스 베버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샤르트르 등의 책 여러 권을 몇 번이고 읽다가 도저히 너무 어렵고 벅차서 겨우 읽어 내려갔던 나의 지적 부족함에 속상했는데, 그 이후에 위대한 철학자들이 쓴 어려운 몇 권의 책들을 손쉽게 정리해 준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쏟아져서 철학 서적이 어렵게만 느끼던 나에게 다시금 철학의 세계로 빠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도 여전히 읽기에 힘들지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제는 비교적 수월하게 정독하게 된 기회도 이 분들의 덕분이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의견 중에서 단 몇 문장에 감탄을 하게 된 내용을 아래에 다시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 조언은 특히 나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는 사실을 여기에 밝히고 싶다. 이 위대한 철학자들이 후세에게 전하려는 이런 조언은 인간의 삶에서 정말로 당연한 것인데 나는 왜 진지하게 생각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는지 답답했다.
1. 쇼펜하우어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말은 유명하다. 이 말은 "고통을 깨달아야 인생을 깨닫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사가 고통의 연속이라는 이유를,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속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 본성의 욕망이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함께 그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하는 힘 또한 삶에 대한 애착과 맹목적인 열망에서 나온다. 이런 욕망을 잘 다스릴 때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봤다.
또한 살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이 세상에서 끝까지 남기를 바란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의 본질이 합리성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라고 말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의견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타인을 통해 얻는 가치는 행복의 본질이 아니다. 내면이 공허하고, 의식이 빈약하고, 정신이 빈곤한 사람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고독과 사교성을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지적인 능력이 클수록 혼자 지내려는 경향이 강하고 지적 능력이 떨어질수록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독은 위대한 사람의 특성이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오직 자신의 고독 안에 생겨난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그 원천인 고독을 피하지 말고 그것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된다. 그 이유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고독한 모습일 때 본래 지닌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그럴수록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기대할 일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거의 없다.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다른 사람과 만나 희생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유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다.
2. 니체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 말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유명한 아포리즘이다. 여기서 "니체가 죽었다고 말한 '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인간의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아는가? "인간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불안한 미래를 견디기 위해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간이 만든 그 '신'을 섬기기 위하여 긴 시간에 걸쳐서 '종교'라는 거대한 작품을 끊임없이 개발하여 왔으며, 나약한 인간이 의지하려고 만든 '신과 종교'를 앞에 두고 오랜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전히 인간은 서로 헐뜯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지난 2천 년 동안 유럽인의 삶에 신은 절대적 의미였다. 니체가 살던 19세기 유럽에도 기독교 사상이 모든 이념과 가치의 기준일만큼 지배적이었다. 인간은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따라 삶을 평가했다. 그런데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었던 신이 더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니체는 기독교의 신이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인간은 죄를 지은 병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하고 두려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신이 결과적으로 인간을 더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는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자신을 광인에 비유하면서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리고 신이 죽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삶을 극복하고 초인이 되어라."라고 니체는 강변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창조하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나로 산다는 것은 창조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창조자가 될 수 있을까? 기존의 가치 목록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 목록을 작성해야만 한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낯선 세계로 나아갈 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목소리를 집중할 수 있다.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니체의 이 의견은, 사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고통과 외로움이 치유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고통과 고뇌는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진정으로 고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고통을, 고뇌를 향한 열정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고통을 추구할 때 그 고통으로 인해 창조적인 역량이 더 세련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외롭고 고통스러울수록 나를 따라다니는 내면의 그림자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오히려 거대한 고통이야말로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이며 이러한 고통이 우리의 생각을 좀 더 심오하게 만든다."라는 니체의 이 말을 위안으로 현재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극복해 보라. 니체는 다른 방법으로 어떤 커다란 위험이나 폭풍이 다가올 때 가능한 한 "몸을 작게 움츠리는 것이다."라는 조언도 하지만, 내 의견에는 자신에 다가온 고통에 대하여,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하여 또 다른 고통으로 감내하는 방법이 더 현명할 수 있다. 결국은 고통에도 곤혹과 불안에 빠져들지 않는 자만이 위대함에 도달할 수 있다.
(참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마흔에 읽는 니체, 곁에 두고 읽는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