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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Aug 27. 2024

냥글냥글 - 중성화 이후 성묘 입양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중성화 이후 성묘 입양을 좋아하는 이유는 

<왜 나는 중성화 이후 성묘 입양을 좋아하는가> 



무턱대고 묻지 마 입양 후 책임 안 지는 세태가 싫어서, 듣기 불편한 소리부터 했는데, 유기묘, 파양묘 성묘 입양만의 매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성묘들은 아깽이들보다 대체로 똑똑하고 소통능력이 뛰어나다. 6살 이상의 고양이들은 사람들의 말을 매우 놀라울 만큼 잘 알아듣는다. 시계도 볼 줄 안다. 시간관념도 있고, 상황 맥락 이해도 매우 훌륭하다. (물론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것과 무시하지 않는 건 별론이다. 우리가 키우는 건, 혹은 키우고 싶어 하는 건 어쨌든 고양이니까.) 


냥바냥이긴 한데, 대체로 말귀도 잘 알아듣고, 상황을 잘 파악하는 똑똑한 아이는 상처도 잘 받는 편이다. 이건 어찌 보면 굉장히 당연한 사실인데, 또 많은 입양자들에게는 꽤나 자주 무시당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황 파악이 빠르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똑똑한 냥이니까, 자신이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선명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마음의 문도 빨리 닫고. 인간에 대한 기대도 매우 낮다. 


그런 아이들은 당연히 자기 방어적으로 굴게 되고, 고양이를 키워보면 공감하게 되는 법이지만 자기 방어적인, 겁 많은 고양이들은 대체로 공격적인 행태를 보인다. 한 마디로 파양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아 공격적인 행동을 표출하는 아이들이 태평하게 잘 적응하는 아이들보다 전반적으로 더 많이 영리했다. 


마음의 상처가 더 커서 외려 적응이 더 느린 편인데, 참을성이 없는 인간들의 상당수는 그것을 못 기다린다. 고양이가 귀여워서, 고양이가 얼른 내게 애교를 피우는 걸 보고 싶어서 데려온 이들에게 기다림으로 가능한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루? 이틀? 일주일? 우리 집에 온 냥이 중에는 당일에 2번이나 파양 당한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공교롭게도 굉장히 똑똑한 아이였고, 2번의 파양의 상처가 극심했기에, 하도 으르렁거리고 물어뜯으려 해서 츄르를 줄 때도 스키장갑을 끼고 줬는데도, 그 스키장갑 천까지 다 뜯어 놓았다. 아이의 탈수를 막기 위해 긴 스푼으로 츄르와 물을 떠먹여 주며 이틀을 으르렁거리며 구석에서 화를 내던 아기는, 지금은 나와 눈만 마주치면 자길 안아주고 쓰다듬고 뽀뽀하라고 냥냥 거리는 짓궂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바뀌었다


고양이 행동 교정 전문 수의사로 유명한 냥신이던가, 그분이 올린 영상에 따르면 파양 당한 고양이는 4살 아이가 가족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화를 내고,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고, 동공은 확대되고, 이를 드러내고, 다가오는 손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애기가 사회성이 없다고 탓해야 할까? 너무 공격적이라 도무지 무서워서 못 키우겠다고 너무도 쉽게 포기하기 전에 말 한마디 양해조차 없이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네 살 어린애의 마음을 되돌아볼 생각을 우리는 왜 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볼 수 있는 너른 마음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면, 아이가 구석진 곳을 찾아다니며 웅크리고 벌벌 떨며 나오려 하지 않는 며칠이, 과연 도저히 못 기다릴 만큼 긴 시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가족을 잃은 아이가 일주일 만에, 한 달 만에 새 가족과 행복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외려 너무 큰 욕심은 아닐까? 


우리 집에 있는 아이 중에 완전히 마음을 다 열기까지 꼬박 2년이 걸린 친구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나는 결코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평생에 걸쳐 받아왔을 아이의 상처를, 고작 몇 년으로, 몇 개월의 기다림으로 상쇄할 수 있다고, 그 아이의 묘생을 겪어본 적 없는 우리가 어떻게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아이를 다 순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바로는 인간보다, 냥이들은, 동물들은 훨씬 더 순수하고 다정하다. 주는 것 이상으로 항상 내게 되돌려주었다. 베풀고 한껏 베풂 받는 삶, 그게 유기, 파양 된 성묘들과 함께 하는 내 삶이다.   


물론 이런 진지한 담론과 별개로 파양을 당해도 빠르게 적응하고 하나도 상처 안 받은 것처럼 잘 지내는 아이도 있다. 매사가 즐거워서 이 아이는 과연 고양이인가 강아지인가 의심한 아이도 있었으니. 그런 슈퍼 개냥이를 만났다면, 미리 축하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이의 넘치는 활력과 사랑만큼 마음껏 사랑해 주시라. 그러면 그 개냥이들은 당신이 화장실 청소를 할 때 어부바를 해달라며 뛰어오를 것이고, 퇴근하고 오면 현관까지 두다다를 해서 개처럼 풀쩍 뛰어 안길지도 모른다. 지나가면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고, 자고 있으면 팔베개를 해달라고 옆에 누울 수도 있다. 자는 얼굴에 침범벅이 되도록 뽀뽀를 하기도 할 것이다. 마음껏 상위 1%의 개냥이와의 행복을 누리면 된다. 


하지만 예민한 대개의 파양 유기묘들은 인간불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하악거리고 발톱을 세운다. 그렇게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내거나, 숨어서 안 나타나던 나이가 용기를 내어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에 호기심을 보여줄 때. 구석에 숨어서 하루종일 으르렁대던 냥이가 내가 내민 습식을 받아먹을 때. 그리고 어느 날인가 내 주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벌러덩 드러눕거나, 뜬금없이 내게 헤드번팅을 할 때, 내가 팔이 떨어져라 흔들던 낚싯대에 반응을 할 때. 이러한 때에,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뿌듯한 기쁨, 벅찬 감격은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우리라.    

물론 건강한 환경에서 태어나 부모묘 밑에서 자라다가 데려온 지인 분양, 펫샵 분양, 캐터리 분양 고양이가 다가올 때도 기쁘다. 하지만 나는 한 번 완고하게 마음을 닫았던 아이가 내게 마음의 문을 열어줄 때가 백배는 더 기쁘고 행복했다. 고된 기다림의 시간만큼이나 더 소중했던 순간들. 그 순간의 신뢰가 쌓여 내 손길에 골골송을 피우고, 간식 먹을 때면 달려 나와 내 무릎 위에 앉고,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눈키스를 보내고, 내가 어딘가 주저앉아 책을 볼 때면 옆구리를 붙이고 앉는 내 소중한 아가들. 그 아가들의 사소한 몸짓, 시선, 목소리 모두가 나와 아이들이 쌓은 신뢰와 애정의 반증이기에, 그 모든 순간들은 소중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내가 열일곱 마리와 살아가면서 정말 뿌듯하다고 느끼고 살아있기 잘했어,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상처 입고, 두려워하고, 감정 따윈 하나도 읽히지 않는, 무감각한 야생의 눈을 하고 있던 아이들의 눈동자가 샛별처럼 빛나고, 그 눈 안에서 아이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이심전심으로 읽힐 때이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은 눈빛부터 다르다. 외롭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빛에 초롱초롱한 생명의 불빛을 우리는 가져다줄 수 있다. 그게 성묘 유기 파양묘 입양의 가장 큰 매력이다.


내가 데려온 내 아이들의 눈이, 늘 할 말이 많은, 초롱초롱하고 생명의 빛으로 가득하기를. 그리고 얼마 전에 지난 세계 고양이의 날을 기념하여 가족을 잃은, 새 가족을 찾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그런 행복이 깃들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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