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
가벼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일전에 '이론과 실무'라는 글을 교육하는 관점에서 썼는데, 같은 맥락에서 쓰는 글입니다.
https://blog.naver.com/dulri0000/223839435776?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과거 근무했던 대기업은 말 그대로 '프로세스' 하나로 굴러가는 곳이었죠.
일명 '체계'가 잡혀 있어 좋기는 한데 체계라는 형식이 커지고 사람들이 그것만 바라보다보니, 실질을 잡아 먹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이 체계라는 것도 Outdated 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예를 들자면 새로운 건에 투자를 집행하려고 하니 리스크, 감사, 준법관리실에서 득달같이 달려들더군요.
심지어 심사 책임자인 저에게도 항의에 가까운 질의를 하더라는 거.
이들이 구체적으로 그리고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상품 SWOT 분석, 특히 리스크 분석을 제대로, 그리고 철저히 해서 가져와' 였습니다.
재밌는 것은 같은 내용을 세 번이나 나눠서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피드백은 또 늦었다는 겁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해당 상품에 기본적 이해도 없었고 알아보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늘어진 절차가 생겼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걸 요구하지도 않죠.
그런데 잘 모르다보니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요구합니다.
왜냐고요?
내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험해 보이거든요.

그렇게 투자를 하는데 시간을 소비했고 그러다보니 적기에 투자할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런 빡센 내부 절차에도 불구하고 대외 감독 기관의 지적을 받았는데, 회사를 떠난 저에게도 금감원 대응 방식을 문의하는 전화가 하루에도 수없이 왔다는 겁니다.
판단 근거와 논리 구조에 대한 설명을 퇴직자에게 물어보는 걸 보면서 '시스템 좋은 그 회사에서 해당 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건가?'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남아 있는 후배들이 불쌍해지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배울 것 없는 멘토가 대다수인 조직만큼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치명적인 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Time Lag이 발생하다 보니 투자 기회는 점점 사라졌고 연말에 남아있는 자금 소진한다고 무리한 투자를 하다가 돈을 까먹는 악순환이 지속되었습니다.
해외에 나가 사는 오너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임원들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았을텐데...
한탄할 일.
흔히 '시스템'이라고 표현되는 체계, 그러니까 형식은 제대로 된 조직이라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실질에 있다는 것.
일을 하면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적절한 투자 대상을 선별하고 리스크를 파악하여 수익을 추구한다' 라는 것이 투자회사의 실질이라면,
형식은 그것을 서포트 해야 하는 것이지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
지금도 세팅된 프로세스를 잘 따르는 것이 일의 주요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주니어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프로세스의 진짜 본질을 볼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한다면, 시스템의 노예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