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의 후더분한 날에 집을 나서자마자 지쳐 터덜터덜 언덕길을 오르는데, 푸른 밀잠자리 한 마리가 공중에 박힌 듯이 멈춰 서서 돌연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쌩하니 가버린다.
대개 매미의 우렁찬 소리에 가려진 여름의 잠자리를 인지하지 못하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잠자리란 가을이 아닌 여름이다. 공활한데 높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하늘 아래서 목격한 청령보다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구름 덩이들 사이를 떼 지어 떠다니며 날개를 반짝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 나의 기억에 더욱 선명히 남은 것이 그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뜨거운 해가 내리쬐면 외려 더 반항심 같은 것이 일어 하늘을 올려다보려 드는 나의 이상한 성미 때문이기도 하다. '청령'이라는 단어가 주는 푸르고 생기 있는 그 느낌과 여름은 어찌 됐든 꽤나 잘 어울린다. 내가 홀로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곤 무심한 얼굴과는 상반되게, 청령(蜻蛉)이 아니라 청령(靑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해맑은 푸른빛을 날개 너머로 투과시킨다. 나는 때때로 그 날개에서 발하는 무지갯빛을 목격한다.
둥글고 드넓은 하늘 대신, 네모나고 좁은 학교 창문 너머로 비쳐 보이는 그 잠자리 떼를 발견하기 무섭게 나의 두 눈은 그들의 운동을 다급히 뒤쫓는다. 하늘이라는 커다란 도화지에서, 스스로를 펜 삼아 연신 원을 그려대는 모습이 마치 색연필 한 자루만으로 희대의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7살 꼬마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하늘 위에 그려진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넓은 시야에는 그 그림이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그렇게 힘을 합쳐 완성하고자 하는 대작(大作)을 나도 목격하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그러나 그 공연을 끝까지 관람하기에는 현생이 바쁘다.
그들의 투명함과 자유분방함과 넓은 견해가 무척이나 닮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들과 나의 유일한 닮은 점은 현대 사회 특유의 바쁜 움직임뿐이다.
비행하는 잠자리와 그 너머로 보이는 산이 맑은 날 바라보아도 늦은 봄비에 젖은 듯 보인 까닭은 애환으로 젖어든 눈이 아닌 세월의 풍파로 인해 희뿌얘진 창문이다. 그 안개 낀 듯 뿌연 창이 나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에 나는 늘 불쾌함을 느낀다. 잠자리의 넓은 시야와,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는 자연적이고 청명한 날개가 또 한 번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먼 곳을 내다보는 능력이 퇴화해 버린, 근시를 가진 나로서는. 인공 날개조차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나로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