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평생 동안 모르고 살았다.
단단하게 뭉친 육각형의 중심에서
여섯 개의 가지가 길게 뻗어 나오고
그 가지에서 자그만 돌기 같은 잔가지가 돋아있는,
누군가 내게 눈송이를 그려보라고 하면
종이가 가득 찰 만큼 큼지막하게 그려내던 그 모양이
정말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심지어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아름다운 결정이, 태어난 모습 그대로 나에게로 와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저 막연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희끄무레하게 바람결에 흩날리다가
금세 질척이는 진눈깨비가 되어버리는 가루눈이
내가 드물게 보았던 눈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의 눈은 그와 확연히 차이가 났다.
하룻밤 사이에 새하얗게 눈안개가 낀 창밖.
청록빛과 흰 안개가 뒤섞인 하늘을 배경으로 굵직한 눈송이들이 고요하게 떨어지는 풍경은 내게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한참을 멀거니 감탄사만 내뱉던 나는 방충망도 없는 숙소의 창밖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눈송이가 내 손에 닿기를 가만히 기다려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없이 깨끗하고 순수하고 특별해 보이는 눈송이가 하나 손바닥 위로 떨어졌지만, 그것은 내 체온에 금방 녹아내려 평범한 무색무취의 물이 되어버렸다.
내 손에 들어오자마자 특별함을 잃어버린 눈, 아니, 눈이었던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손을 창밖으로 뻗은 후 손바닥을 천천히 아래쪽으로 뒤집었다. 자그만 물방울은 내 손바닥에다가 젖은 길을 만들며 느릿느릿 아래로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나에게 닿지 않았더라면, 이 눈은 케이크 위에 발린 생크림처럼, 하얗고 고르게 세상을 덮는 데 가세했을 텐데. 아니면 건물 위, 자동차 위, 벤치 위에 켜켜이 쌓여있다가 눈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의 정수리에 한번 앉아보았다가, 마치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처럼 머리카락을 타고 주루룩 내려왔을 수도 있는데. 땅에 내려앉아 보기도 전에 흐무룩 녹아버린 눈물을 다시 원래의 행선지로 되돌려주며, 나는 눈에게 주어진 어떠한 보편적 기회를 순식간에 빼앗아버린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부디, 함박눈을 처음으로 마주한 이의 손을 거쳐간 것에도 일말의 의미정도는 부여해 주기를-
눈에게 변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미 방 안의 공기가 차게 식어버린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찬바람이 새어드는 창문을 힘주어 닫았다.
그리고 구경만 멀거니 하고 있는 대신에, 눈을 몸소 맞아보기 위해 누구보다도 빠르게 숙소를 나섰다. 길게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이윽고 로비 밖으로 나서자 생각보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눈에 잠시 멈칫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눈을 맞아보겠어' 하는 생각에 결연하게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조심스레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목격한 눈은, 신비롭고 투명한 결정은 아니었다. 그저 하얗게 얽혀있는 찌그러진 타원 모양의 눈송이었다. 따지고보면 그리 아름답다고 할만한 모양은 아니었지만, 이 자그마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온 세상을 다 덮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 나는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 눈이 어떻게 세상을 이토록 하얗게 만들었는지는 금방 실감할 수 있었다. 바깥에 나온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은 나의 패딩점퍼 위, 신발 위에 찰기 있는 눈이 금방 달라붙어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털어내지 않고, 눈이 눈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가늘게 실눈을 뜬 채 하늘을 바라보며 쉬지않고 걸었다. 아까부터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내 귀에 들리는, 낯선 '뽀드득' 소리를 더 듣기 위해서였다. 내가 살던 곳에는 눈이 이렇게 두껍게 쌓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밟을 때 이런 소리가 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껏 내 머릿속의 눈은 마냥 고요한것이었는데.'
나는 생각보다 크게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신발 밑으로 뻑뻑한 스티로폼 박스 같은 뭔가를 밟고 있는 듯한 이질적인 감촉이 전해져 나의 감각을 한층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 선명해진 감각 때문인지, 내가 밟은 자리의 눈이 원래보다 조금 투명해져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눈밭에 찍힌 내 발자국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나는 뜬금없이 전에 밟지 않은 곳의 눈 위로만 걸으며 최대한 많은 발자국을 남겨보기로 하고 걸음을 더욱 부지런히 옮겼다. 그러나,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내가 걸어왔던 쪽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내 발자국 위로 다시 눈이 하얗게 쌓여있는 바람에 더 이상 내가 밟은 곳과 밟지 않은 곳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나는 짧은 찰나동안 즐겼던 혼자만의 놀이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눈사람을 만들어야지.
그 발자국 놀이를 끝내고, 잠시동안 눈이 내리는 모습을 할일없이 바라보던 나는, 문득 눈사람을 만들겠다는 의지에 디시 휩싸여 눈밭에 냅다 쭈그려 앉았다. 눈을 주먹 속에 뭉쳐보았다가 다시 손을 펴자, 만두 같은 모양으로 빚어진 눈덩이가 나타났다. 나는 그 눈만두 위에 대고 하아- 입김을 길게 불어보았다. 방금 막 쪄내어 김이 나는 만두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다. (실제로는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만두와는 정반대로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눈 속에서, 18세의 고등학생은 소꿉놀이를 즐기는 8살 여자아이로 돌아갔다. 소꿉 장난감이 없어도 금방 만들어낼 수 있었고, 상대역이 없어도 혼자서 모든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하던 놀이를 그만두고 빠르게 다음 놀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눈으로 만두를 빚어내는 것을 금세 그만두고,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눈사람의 머리와 몸통이 될 눈덩이를 빚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만들어본 눈사람이었지만, 나는 꽤나 그럴듯한 눈사람을 만들어냈다. 매끈하게 둥근 눈덩이를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눈을 덧붙이고 손으로 털어내 가며 최대한 동그랗게 빚어낸 눈덩이 두 개가 나란히 붙은 그 위에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만든 눈과 입을 주었고, 다른 나뭇가지 하나를 다시 반으로 나누어 두 팔을 만들어주었다.
꼬마 눈사람을 다 만들고 난 뒤, 나는 다시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순전히 눈을 뭉치는 것 자체가 목적인 놀이였다. 조금씩 조금씩 눈덩이를 굴리다 보면 얼마 안 가 아주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있을 것 같았다. 여기 쌓여있는 많은 눈을 다 모아서 눈덩이를 만들면 내 키보다도 커질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호기롭게 눈덩이를 꼭꼭 뭉친 뒤 바닥에 굴리며 덩치를 빠르게 키우려 했다. 그러나 조금 전 자그만 눈덩이를 만들 때와는 다르게 눈덩이가 자꾸만 갈라지고 쪼개졌다. 눈을 뭉치는 요령이 없어서 그런 걸까, 눈덩이를 너무 세게 눌러서 그런 걸까. 부서진 눈덩이를 다시 뭉쳐보려 했지만 이미 한 번 여러 개의 덩어리로 나눠진 눈은 쉽게 다시 합쳐지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산산조각 난 눈덩이를 뒤로한 채 내가 만들어둔 눈사람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 사이 머리 위로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은 눈사람은 미용을 오랫동안 하지 않아 털이 길게 자란 말티즈처럼 눈과 입이 하얗게 덮여있었다. 나는 눈에 젖은 장갑을 벗고는 눈사람의 얼굴을 살짝 털어내주었다. 그리고 더는 눈을 맞지 않도록 지붕이 덮인 로비 문 앞쪽 기둥 옆으로 눈사람을 옮겨주었다. 눈사람이 부서지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놓고, 나는 다시 눈을 맞으러 나갔다. 그새 가늘어진 눈은, 이제 흰 알갱이가 아니라 결정체의 모양 그대로 내 머리카락 끝과 옷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8살 무렵 과학책에서 눈 결정의 모양을 처음으로 보았던 때로 돌아간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눈이 현미경이 된 듯 낯선 느낌이 든다. 내 눈동자에 눈 결정이 모양 그대로 들어앉은 착각이 인다. 아니, 속눈썹 끝에 눈 결정이 걸려 가까이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얀 눈안개가 낀 겨울 하늘에서, 투명하고 아름다운 스카이 다이버들이 내 시야 안으로 연신 뛰어든다. 우아하게 허공을 가르며 하강하는 그들의 몸짓을 끝까지 지켜본다. 누구도 그들의 낙하에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에게 규칙의 틀을 갖다 대지 않는다.
눈은 자유롭게 내린다.
그들을 한참 바라보며, 나도 그 거짓 없는 자유 속에 섞여 들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나의 몸은 가볍지 않았다.
나의 몸은 투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혼은 가벼울 것이다.
나의 혼은 투명할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형체에만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마음에 집중한다면, 나도 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자, 내 몸이 어디론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느낌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아주 서서히, 투박하지 않은 가뿐한 모양으로, 한없이 부드러운 곳에 몸을 뉘이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내가 어디로도 떨어지지 않았고 누워있지도 않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에도 그 느낌은 쉬이 증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