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로 감정을 숨기며 버티는 사람들
우리는 아침 출근길부터
이미 감정을 준비하며 회사를 향해 걷는 존재이다.
웃어야 할 순간과 감출 감정을 따로 챙기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도 ‘괜찮다’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이다.
상사 앞에서 우리는 종종 웃음을 연기한다.
말에 가시가 박히더라도,
표정은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그 순간, 내 감정은 어딘가 뒤편에 밀려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감정노동은 단지 서비스업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회의실 안, 보고서 앞,
그리고 커피 머신 옆의 사소한 대화 속에도 숨어 있다.
직장인은 언제나 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근육을 쓰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나도 억지웃음으로 하루를 버틴 적이 있다.
속으로는 불편하고 화가 났지만,
표정은 부드러워야 한다고 배웠다.
그때 나는 회사에서 살아남는 법이 진심이 아니라
‘조절된 감정’이라고 생각했었다.
문제는 그것이 하루, 한 달,
그리고 몇 년이 되면 자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바깥의 나와 속마음의 나는 점점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틈새가 넓어질수록 우리는 지쳐가는 것이다.
감정을 감추는 일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조직 문화가 허용하지 않는 감정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괜찮은 사람’의 가면을 쓰고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가면을 오래 쓰면 얼굴이 굳는다.
진짜 웃음과 가짜 웃음의 경계가 흐려진다.
결국 우리는 내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회의실에서 상사의 지적에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회의실을 나와 커피를 마셨다.
그 순간 나는 내 감정을 버리고
조직의 기대만 붙잡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 날이 여러 번 반복되자 퇴근길에 갑자기 허무함이 몰려왔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지금 내 감정을 잃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직장에서 웃는 얼굴은 유능함으로 해석될 때가 많다.
표정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강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강해 보이는 얼굴을 연습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해 보이는 얼굴이
곧 강한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얼굴 뒤엔 상처와 피로가 쌓여 있는 경우가 많다.
감정을 숨기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감정노동은 단순히 ‘기분이 나쁜데 웃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조차 감정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더 깊은 심리적 충격이다.
이것은 자존감과 자기 정체감까지 흔드는 경험인 것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괜찮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나를 속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 작은 결심이 나에게 숨 쉴 틈을 만들어준 것이다.
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이다.
‘오늘은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것이 자아 균열을 막는 첫걸음인 것이다.
조직은 감정이 없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창의성, 공감, 협업 모두 감정에서 시작된다.
결국 감정을 누르라는 메시지는 조직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사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조직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감정을 무시하는 리더는 결국 사람의 마음도 잃는다.
반대로 감정을 존중하는 리더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감정노동이 쌓이면 우리는 번아웃에 가까워진다.
지치는 이유는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감정을 숨길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 고단함은 ‘감추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직장에서 감정은 숨겨야 한다는 오래된 규칙이 있다.
하지만 그 규칙은 지금 우리 시대에 더 이상 맞지 않는다.
감정을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역량인 것이다.
모든 감정을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지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자존심인 것이다.
우리가 웃는 이유가 강요가 아니라 선택이길 바란다.
감정을 숨기기 위해
‘괜찮다’를 반복하는 삶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진짜 감정을 인정할 때 비로소
건강한 일의 의미가 회복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