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도서관] 논현문화마루도서관 (1) 공간 편
[위클리도서관]은 국문과가 전하는 도서관 가이드입니다.
방방곡곡 도서관을 다니며 공간, 인간, 큐레이션(책)에 대한 인사이트를 나눕니다.
더 많은 이들이 도서관을, 책을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논현은 부내나는 ‘그들만의 동네’라고만 생각했다.
레몬 톤으로 맞춘 디자인부터,
책 큐레이션을 넘어 의자 큐레이션까지
이것이 정녕 공공기관의 인테리어가 맞는가?
논현문화마루도서관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로131길 40 4,5층
운영시간
성인자료실(5층) | 09:00~22:00 (화~금), 09:00~18:00 (토~일)
어린이자료실(4층) | 09:00~18:00 (화~금), 09:00~19:00 (토~일)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공휴일, 매주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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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문화마루도서관의 매력 중 하나는 쌈박한 외관과 따뜻한 내부의 격차에 있다.
건물 외관만 보면 그리 들어가고 싶진 않다. 더군다나 ‘도서관’ 이라는 이름표까지 생각하면 말이다. 네모난 상자 모양에, 유리창 많은 전형적인 회사 오피스다.
이곳은 조금 특이하게, 강남구 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강남문화원’ 건물의 4,5층을 도서관이 차지하는 구조다. 건물 앞에는 수십 개의 프로그램 소개지가 잔뜩 붙어있다.
그런데 반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레몬향이 날 것 같은 인테리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노출천장으로 만들어 층고가 확 높아지며 여유로움을 풍긴다. 책 읽으러 도서관에 온 사람이 자고로 이런 여유로움임을 정확하게 간파한 바다.
천장이 사라지고 드러난 배관의 시니컬함과 바닥에 깔린 카펫의 따뜻함이 조화롭다. 카펫은 짙은 남색인데 반해, 천장에 달린 흡음판*은 노란색과 주황색이 뒤섞인 밝은 톤이라는 점도 공간의 심미성을 한층 높인다. 위쪽은 밝고 아래쪽은 짙은 색채 구성이, 도서관을 기반으로 사람들이 저마다 삶의 단단한 기반을 쌓아가고 소양을 길러가는 모습을 비유하는 듯하다.
* 흠음판: 소리의 반사를 줄여 소리와 에코를 줄이는 패널
인간관계를 논할 때 ‘초두 효과’를 빼놓을 수 없다. ‘첫인상 효과’라고도 하는데, 만난 지 3초 만에 상대에 대한 스캔을 완료해서 판단을 내린다는 의미다. 처음 접한 정보가 나중에 알게 되는 정보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한 법이다. 교수님을 눈 앞에 둔 대학 발표도, 주요 투자자를 설득해야 할 IR 피칭도, 발표의 대가들은 늘 처음을 잡으라고 말한다. 고객 경험을 설계하는 마케터도 마찬가지다. 팝업스토어의 처음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도서관도 결국 하나의 공간이기에, 잘 만든 공간은 ‘맨처음 무엇을 만나, 어떻게 느끼느냐’로 판명난다.
도서관은 건물 4층과 5층에 위치해 있는데, 4층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반기는 건 33개의 잡지 콜렉션이다. 패션∙미용 잡지부터, 서점에서 처음 접했지만 랩핑되어 읽지 못했던 브랜드 탐구 매거진 <B>, 국문과로서 반가운 <Littor>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르고 있었다.
잡지를 구비해둔 도서관은 많지만, 도서관을 찾은 이가 반강제적으로 잡지 콜렉션부터 마주치게끔 하는 도서관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문화마루도서관이라는 이름답게, '문화 하나는 끝장 낸다'는 게 포부가 보인다.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호학자들의 관점에 얼추 동의한다. 공간 설계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가 바로 하나가 고객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마다 기호를 붙여두는 일이다.
층별 안내판은 “당신이 찾는 그 열람실을 이 층에 있습니다”라는 말이고, 화장실 그림문자는 “급한 분은 이쪽으로” 라는 뜻이다. 엉덩이가 푹 들어갈만큼 푹신한 의자는 “여유를 즐기며 책을 읽고 싶은 분들은 이 공간을 활용하세요” 라는 의미이며, 그룹 스터디존에 설치된 유리벽은 “함께 이야기해도 좋지만, 다른 이의 집중도 존중해주세요.”라고 읽힌다. 공간은 이런 식으로 사람에게 말을 건다. 유능한 공간 기획자는 기호를 센스 있게 활용한다.
좋은 센스는 수치화할 수 없는 현상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 최적화하는 능력이다
일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미즈노 마나부는 <센스의 재발견>에서 센스를 이렇게 정의했다. 보통 누군가에게 “센스가 좋다”고 할 때, 그 말은 무 자르듯 명료하게 설명되기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상황 맥락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내뱉은 말이어야만 ‘센스있는 말’이 될 수 있다.
명확한 기준과 절차대로 움직이는 공공기관은 ‘센스’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공공기관의 의사결정은 ‘어디서나 동일한 톤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 위에서 움직이는 반면, ‘센스’는 상황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유연함을 전제로 한다. 센스는 개인의 책임을 수반하지만, 공공기관은 집단 책임을 중시한다. 그래서 공공기관 안에서는 센스를 발휘하기보다 틀리지 않는 선택, 소위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래서 그런지, 공공기관에서 센스를 발견할 때마다 묘한 희열을 느낀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형성된 문화를 파괴하는, 뭘 좀 아는 기획자들의 손길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매우 일반적인 공지문에서 그 센스를 발견했다.
‘정숙’ 공지는 도서관에서 빼놓으면 섭하다. 인간이 태어나 처음 하는 (그것도 건강하다는 증표로서 장려되는!) 행위가 ‘소리내서 울기’인데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하는 공간’이라니, 인간에겐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일 수밖에. 최근 들어서는 카공족이 늘어나며 ‘자리 차지’ 관련 공지가 많이 나오고 있다.
공지문 제목을 ‘어른들께 드리는 부탁’이 아니라 ‘5층 열람실 이용 자제‘라고 썼으면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어린이 친구들에게 드리는 부탁‘이 아니라 ’성인 열람실 소음 자제‘라고 썼다면? 대부분의 공공시설 안내문은 후자를 따른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부탁이 있다'는 제목과 본론부터 꺼내는 제목은 글쓴이의 태도부터 다르다. 말하는 이가 공손하면, 읽는 이도 자세를 고쳐먹게 된다. 자신을 ’어른‘ 또는 ’어린이 친구들‘이라 대우하며 부탁한다는데, 당연히 열린 마음으로 읽게 되지 않을까?
서비스기획/마케팅 분야에서 몇 년 전부터 새롭게 떠오르는 UX Writing 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용자 중심 카피’ 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정보 제공자가 아닌 정보 습득자의 입장에서 문구를 작성하는 것이다.
‘회원가입을 취소하시겠습니까?’라는 알림창에 ‘Yes/No’라는 선택 창이 뜨면 Yes가 회원가입에 대한 Yes인지, 취소에 대한 Yes인지 헷갈린다. 그럴 때 ‘Confirm/Cancel’을 띄워 고민을 줄여주는 게 UX Writing이다.
UX(User Experience)는 원래 디자인과 관련된 분야였는데, 이젠 디자인을 넘어 단어 하나하나까지 세심함을 기울이고 있다. 모바일 금융서비스 ‘토스뱅크’가 이쪽 분야에서는 최고다. ‘대출 잔액이 줄어들었어요’라고 말하는 대신, ‘갚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신용 점수가 달라졌는지 확인해보세요.’라는 알림을 띄운다.
‘UX Writing’의 핵심은 ‘관점 바꾸기’다.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 서 보는 것. 선인들이 그것을 ‘역지사지’라고 표현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리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 디지털 기술과 모바일 테크놀로지로 겹겹이 둘러싸인 앱 서비스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곳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일 뿐이다. 도서관 입구에 말없이 서 있는 이 판넬도 살아 숨쉬는 한 담당자가 글을 쓰고, 디자인하고, 인쇄하고, 판떼기에 붙인 결과anf다. 그 담당자가 평균보다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인 덕분에 나는 센스 있는 기호를 만날 수 있었다. 공공의 언어에 더 많은 센스와 다정함이 침투하길 바라본다.
| 이 글은 논현문화마루도서관 2탄 - '큐레이션' 편으로 이어집니다.